voice phishing — fiction 03
각하합니다
1심 패소, 항소 기각, 그리고 변호사비만 남은 서류 더미
정숙은 법원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서울북부지방법원. 건물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관공서 특유의 차가운 복도, 엘리베이터 앞에 늘어선 사람들, 법정 번호를 확인하며 오가는 양복 차림의 사람들. 정숙은 태호와 함께 3층 민사법정 앞 복도 벤치에 앉았다.
소장을 접수한 지 3개월이 지나서야 첫 기일이 잡혔다. 변호사는 기일 전에 한 번 만났다. 15분이었다. 변호사는 소장 내용을 설명했고,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라고 말했다. 정숙은 그 말을 믿고 싶었다.
법정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갔다. 드라마에서 보던 것보다 작았다. 판사석, 원고석, 피고석. 피고석에 수거책 김모가 앉아 있었다. 국선변호인과 함께.
22세. 정숙은 김모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마른 체형, 트레이닝 복, 고개를 숙인 채 바닥만 보고 있었다. 정숙이 상상했던 범죄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수진보다 여섯 살 어린 청년이었다.
이 사람이 내 돈을 가져갔다. 아니, 이 사람은 전달했을 뿐이다. 진짜 가져간 사람은 어딘가 다른 나라에 있다.
재판이 시작되었다. 변호사가 소장을 읽었다. 피고 김모의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3,700만 원 및 지연이자 청구.
김모의 국선변호인이 답변했다.
"피고는 택배 알바인 줄 알았으며, 인출한 현금은 즉시 제3자에게 전달했습니다. 피고에게 고의가 없었고, 현재 무자력 상태입니다."
판사가 김모에게 물었다.
"피고, 이 돈이 범죄 수익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까?"
김모가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가 작았다.
"... 몰랐습니다. 텔레그램에서 택배 물건 대신 받아주는 알바라고 해서..."
"현금을 ATM에서 인출하는 것이 택배 알바라고 생각했다는 겁니까?"
김모가 대답하지 못했다. 국선변호인이 대신 말했다.
"피고는 사회 경험이 부족한 22세 청년으로, 보이스피싱 조직의 기만에 의해 범행에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정숙은 복도 벤치에서 들었던 변호사의 말을 떠올렸다.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법정 안의 공기는 걱정하지 않을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6개월 후, 판결문이 나왔다.
변호사가 전화로 결과를 알려주었다. 정숙은 부엌에서 전화를 받았다. 통화 시간 4분 17초.
1. 피고 김모는 공동불법행위자로 인정
피고가 보이스피싱 범행의 말단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대법원 2024.12.12. 선고에 따라 현금 수거 행위는 사기 범행의 핵심적 구성 요소에 해당하므로 공동정범의 책임이 인정됨.
2. 단, 원고에게도 과실이 있음
인용금액: 3,700만 원 × 60% = 2,220만 원
2,220만 원. 판결문 위의 숫자는 그랬다.
하지만 정숙은 이미 알고 있었다. 경찰이 말해준 것을, 인터넷에서 읽은 것을, 이 6개월 동안 천천히 받아들인 것을.
"변호사님, 그래서 돈을 받을 수 있나요?"
3초의 침묵.
"... 김모의 재산 조회를 했는데요. 현재 수감 중이고, 급여 소득이 없고, 부동산도 예금도 없습니다."
"그러면요?"
"강제집행을 신청해도... 집행할 재산이 없으면 집행불능 조서가 발급됩니다."
승소했지만 받을 돈이 없습니다.
판결문에 적힌 2,220만 원은 존재하지 않는 돈이었다. 법이 "받아야 한다"고 선언했지만, 법이 "줄 수는 없었다." 김모의 전 재산은 교도소 영치금 3만 2천 원이었다.
강제집행 신청서를 냈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집행불능)
정숙은 포기하려 했다.
이미 345만 원을 썼고, 받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판결문이라는 종이 한 장과 집행불능 조서라는 종이 한 장. 합쳐서 345만 원짜리 종이 두 장.
수진이 찾아왔다. 주말마다 오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이번에는 노트북을 들고 왔다.
"엄마, 내가 좀 찾아봤어."
수진은 ChatGPT에 판결문을 입력하고, 항소 가능성을 물어보았다.
• 부천지법 2023가단XXXXX — 수거책 70% 책임 인정, 피해자 과실 30%
• 대전지법 2023나XXXXX — 기관사칭형의 기만성이 극히 높은 경우 피해자 과실을 25%로 축소
AI 음성 합성 기술의 고도화와 피해자의 연령, 사회적 경험 등을 종합적으로 주장하시면 과실비율 경감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엄마, 과실비율을 줄일 수 있을지도 몰라."
"또 돈 드는 거 아니야?"
"내가 항소이유서 초안을 쓸게. 변호사 없이."
수진은 일주일 동안 밤마다 ChatGPT와 대화했다. 법률 용어를 물어가며, 항소이유서를 작성했다. 총 18페이지.
"피고의 범행 가담 정도, 피해자의 연령(56세), AI 음성 복제 기술의 고도화, 원격 제어 악성앱의 전화 가로채기 기능(피해자가 112에 전화해도 범죄 조직이 응답)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원고의 과실비율 40%는 과도하다..."
정숙이 물었다.
"이게 되는 거야?"
"모르겠어. 근데 345만 원은 이미 쓴 거잖아. 항소 인지대는 15만 원이면 돼."
15만 원. 그 정도는 할 수 있었다. 항소장을 접수했다. 수진이 직접 법원에 갔다.
항소심은 3개월이 걸렸다.
이번에는 정숙이 직접 법정에서 진술했다. 변호사 없이, 딸과 함께.
"저는 딸의 목소리를 듣고..."
정숙의 목소리가 떨렸다. 판사를 올려다보았다. 판사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딸이 위험하다고... 울면서 전화가 왔습니다. 28년 동안 키운 딸의 목소리였습니다. 엄마가 그 전화를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법정이 조용했다. 판사가 메모를 했다. 수진이 엄마 옆에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원고는 112에 확인 전화를 했다고 하셨는데, 그때 범죄 조직이 받았다는 것이죠?"
"네. 나중에 알았습니다. 앱을 설치한 순간부터 제 전화는 다 그쪽으로 갔다고요."
판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진은 그 고개 끄덕임에서 희망을 보았다. 정숙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6개월간의 법원 경험이 정숙에게 가르쳐준 것이 하나 있었다. 판사의 고개 끄덕임은 동의가 아니라 확인이라는 것.
3개월 후, 판결문이 나왔다.
AI 음성 합성 기술의 발전은 인정하나, 금융거래 시 본인확인 의무는 기술 발전과 무관하게 피해자에게도 존재한다. 원심이 인정한 과실비율 40%는 제반 사정에 비추어 부당하다고 볼 수 없다.
항소 기각. 1심 판결 유지.
수진이 판결문을 읽고 또 읽었다. "기술 발전과 무관하게 피해자에게도 존재한다." 법은 딸의 목소리가 가짜인지 진짜인지를 판단하지 않았다. 법은 피해자가 앱을 설치한 행위, 비밀번호를 입력한 행위, 원격 제어를 허용한 행위를 판단했다.
"엄마, 미안해."
"네가 뭘 미안해. 네가 해준 것만으로 고마워."
수진이 18페이지짜리 항소이유서를 보았다. 일주일의 밤을 쏟은 종이 뭉치.
법원이 보지 않은 것이 있었다. 엄마가 앱을 설치한 이유는 "수사관의 지시"가 아니었다. 딸이 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8년 동안 키운 딸이 "엄마, 나 큰일 났어"라고 울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엄마에게 '주의 의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법은 그것을 과실이라고 불렀다.
항소 기각 결정문을 받은 다음 날, 전화가 왔다.
발신자 이름은 법률사무소였다. 정숙은 변호사에게서 전화가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받은 것은 변호사가 아니었다. 사무관이었다. 처음 상담했던 바로 그 사무관.
"... 비용이 얼마인가요?"
300만 원. 또 300만 원.
정숙은 조용히 생각했다. 이 사무관은 항소가 기각된 다음 날 전화를 걸어, 300만 원의 상고를 권유하고 있다. 패소해도 돈을 받는 사람은 법률사무소다. 착수금은 결과와 무관하다.
정숙이 조용히 말했다.
"... 됐습니다."
"됐다고 했습니다."
전화를 끊었다.
정숙은 식탁에 앉아 서류 더미를 바라보았다. 소장, 답변서, 1심 판결문, 집행불능 조서, 항소이유서, 항소 기각 결정문. 두꺼운 서류 뭉치. 이것이 345만 원의 무게였다.
- 범죄 피해금 -3,700만 원
- 변호사 착수금 (1심) -330만 원
- 인지대 + 송달료 -15만 원
- 카드론 상환금 (24개월) -552만 원
- 금감원 환급금 +18,240원
- 판결 인용금액 (집행불능) +0원
정숙은 가계부를 펼쳤다. 펜을 들었다. 마지막 줄에 적었다.
총 손실: 4,597만 원. 남은 것: 적금 1,655만 원.
펜을 내려놓았다. 창밖을 보았다. 중계동 아파트 단지에 저녁 해가 지고 있었다.
정숙은 생각했다. 음지에서 3,700만 원을 잃었다. 양지에서 897만 원을 더 잃었다. 범죄자는 3,700만 원을 가져갔고, 법률사무소는 345만 원을 가져갔고, 카드론 이자로 52만 원을 더 쓸 것이고, 법원은 인지대와 송달료로 15만 원을 가져갔다.
범죄자보다 정부와 변호사가 더 정확하게 돈을 받아갔다. 범죄자의 환급률은 0.049%였지만, 변호사의 회수율은 100%였다.
정숙은 서류 더미를 봉투에 넣었다. 봉투 겉면에 적었다. "보이스피싱 관련." 그리고 서랍에 넣었다.
다시 꺼내 볼 일은 없을 것이다.
법은 피해자에게
"당신 잘못도 있다"고 말했다
마지막 편에서 정숙은 숫자를 정리한다. 잃은 것과 남은 것의 가계부. 그리고 엄마의 전화가 다시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