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ice phishing — fiction 02
본인의 돈이
아닙니다
경찰서, 금감원, 은행... 자기 돈을 찾으러 가는 길이 이렇게 긴 줄 몰랐다
경찰서는 생각보다 밝았다.
정숙은 형광등이 이렇게 밝은 곳에서 우는 것이 어색했다. 드라마에서 경찰서는 항상 어둡고 긴박했는데, 현실의 경찰서는 주민센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플라스틱 의자, 정수기, 벽에 붙은 보이스피싱 주의 포스터.
그 포스터를 어제까지는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남편 태호가 운전해서 노원경찰서까지 왔다. 밤 10시가 넘었다. 수진은 집에 남겨두었다. 딸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다.
"피해사실확인서를 작성하셔야 합니다."
경찰관은 젊었다. 정숙보다 수진에 더 가까운 나이였다. 그는 양식을 꺼내며 물었다.
"피해 금액이 얼마라고 하셨죠?"
"예금에서 3,200만 원이요. 그리고 카드론으로 500만 원."
"합계 3,700만 원. 지급정지 요청은 하셨습니까?"
태호가 대답했다. 오후에 이미 은행에 전화해서 지급정지를 요청했다고.
"잔액은 확인하셨습니까?"
태호의 입이 굳었다. 정숙이 대신 말했다.
"4만... 7천 원인가 남았다고 했어요."
경찰관이 양식에 숫자를 적었다. 볼펜 소리가 조용한 사무실에서 비정상적으로 크게 들렸다.
"지급정지가 걸린 시점의 잔액 범위 내에서만 환급이 가능합니다. 이미 인출이 완료된 금액은..."
경찰관이 말을 흐렸다. 남은 말을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표정이었다.
"돌려받을 수 있는 건가요?"
정숙이 물었다. 경찰관이 잠시 멈추었다가 대답했다.
"금감원 피해구제 절차를 밟으시면 잔액 범위 내에서 환급받으실 수 있습니다. 다만..."
"다만?"
"잔액이 4만 7천 원이시면... 여러 피해자분이 계시면 비례배분이 되기 때문에..."
정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다는 뜻이 아니었다. 더 듣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태호가 정숙의 손을 잡았다. 경찰서의 밝은 형광등 아래에서, 56세 주부와 58세 자영업자는 플라스틱 의자에 나란히 앉아 피해사실확인서가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벽의 포스터가 말했다. "보이스피싱, 의심하면 전화 끊으세요." 정숙은 그 포스터를 보지 않았다.
2주 후, 경찰에서 전화가 왔다.
"박정숙 님, 관련 사건에서 현금 수거책 2명을 검거했습니다."
수거책. 정숙은 그 단어를 처음 들었다. 경찰이 설명했다. 보이스피싱 조직은 계좌에서 빼낸 돈을 ATM으로 인출하는 사람을 따로 고용한다. 조직의 말단이다. 대부분 인터넷에서 '고수익 알바'를 보고 지원한 사람들이다.
정숙의 3,700만 원을 인출한 사람은 두 명이었다.
22세와 19세. 합쳐서 50만 원을 받고 3,200만 원을 인출했다. 카드론 500만 원은 다른 경로로 타행 대포통장을 거쳐 사라졌다.
"형사 절차는 진행됩니다. 다만 피해금 환급은 별도 절차입니다."
"그 사람들한테서 제 돈을 돌려받을 수 있나요?"
전화기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 수거책들은 대부분 재산이 없습니다. 민사소송으로 손해배상 판결을 받으셔도, 실제로 집행할 재산이 없으면..."
경찰관은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정숙은 이 2주 동안 배운 것이 있었다. 법의 세계에서는 아무도 끝까지 말하지 않는다는 것. 뒷말은 항상 피해자가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
돈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수거책 김모는 체포 당시 소지금이 8만 원이었다. 은행 잔고 12만 원. 부동산 없음. 차량 없음. 이모는 더 없었다. 소지금 2만 3천 원. 은행 계좌 없음.
정숙의 3,200만 원을 인출한 두 사람의 전 재산을 합치면 22만 3천 원이었다.
금감원 1332에 전화하면 안내 음성이 나온다.
"보이스피싱 피해구제 신청은 1번, 불법사금융 피해상담은 2번..." 정숙은 1번을 눌렀다. 대기 음악이 3분 27초 동안 흘렀다. 정숙은 부엌 식탁에 앉아 대기하면서, 식탁 위의 가계부를 펼쳤다. 빈 페이지였다. 아직 적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금융감독원 피해구제센터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상담원은 친절했다. 정숙은 사건 번호를 불러주었고, 상담원은 절차를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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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지급정지 확인 — 이미 완료. 사기 이용 계좌에 대해 은행이 지급정지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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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채권소멸절차 — 금감원이 해당 계좌의 채권소멸 공고를 2개월간 진행한다. 이의 신청이 없으면 잔액이 소멸 처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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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피해금 환급 — 소멸된 잔액을 피해자에게 환급한다. 다만, 피해자가 여러 명이면 비례배분한다.
"저희 계좌 잔액이 4만 7천 원 정도라고 하던데요..."
"네, 지급정지 시점의 잔액 기준입니다. 해당 계좌에 다른 피해자분도 계시면 비례배분이 됩니다."
"다른 피해자요?"
"네. 같은 대포통장에 여러 분의 피해금이 입금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2개월이 지났다. 금감원에서 결과가 나왔다.
귀하가 신청하신 피해구제 건에 대해 아래와 같이 환급금을 통지합니다.
사기이용계좌 잔액: 47,320원
해당 계좌 피해자 수: 4명
귀하 피해금액 비율: 38.5% (3,200만 원 / 8,310만 원)
환급금: 18,240원 환급 계좌로 입금 예정입니다.
3,700만 원을 잃었다. 법이 돌려준 돈은 18,240원이었다.
정숙은 통지서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숫자를 세 번 읽었다. 18,240원. 만 팔천이백사십 원. 마트에서 삼겹살 두 근에 상추 한 봉지를 사면 남는 돈.
카드론 500만 원은 환급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숙의 이름으로 실행된 정식 대출이었다. 범죄에 이용되었든 아니든, 신용카드사 입장에서는 정숙이 빌린 돈이었다. 매달 23만 원씩 24개월. 이자 포함 총 상환액 552만 원.
범죄자가 빌린 돈을 내가 갚는다.
정숙은 가계부를 펼쳤다. 이번에는 적었다.
(원)
인터넷에서 '보이스피싱 피해금 회수'를 검색하면, 법률사무소 광고가 쏟아진다.
정숙은 원래 인터넷 검색을 잘 못 했다. 수진이 대신 검색해주었다. 화면에는 "피해금 환수 가능!", "보이스피싱 전문 변호사", "무료 상담"이라는 문구가 줄줄이 떴다.
"엄마, 여기 무료 상담이래. 한번 가볼까?"
강남역 근처의 법률사무소였다. 간판이 번듯했다. 로비에 커피 머신이 있었고, 소파가 깨끗했다. 정숙은 이런 곳에 와본 적이 없었다.
상담실로 안내받았다. 들어온 사람은 변호사가 아니었다. 사무관이었다. 명함에는 '법률사무관'이라고 적혀 있었다. 정숙은 사무관과 변호사의 차이를 몰랐다.
"어머님, 사건 내용 잘 들었습니다. 수거책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하시면 됩니다."
"그게... 돈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건가요?"
"법적으로 가능합니다. 불법행위에 해당하니까요. 민법 750조,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입니다."
사무관은 유창했다. 법조문 번호를 줄줄 외웠고, 손해배상 청구의 승소 가능성을 설명했다. 정숙은 반쯤 알아듣고 반쯤 못 알아들었다. 알아들은 것은 하나였다.
"가능하다"는 말.
사무관이 비용을 안내했다.
| 항목 | 금액 |
|---|---|
| 착수금 (1심) | 330만 원 |
| 인지대 + 송달료 | 약 15만 원 |
| 성공보수 | 배상금의 10% |
| 선납 합계 | 345만 원 |
345만 원. 정숙의 남은 재산에서 또 345만 원을 꺼내야 했다.
"... 생각해볼게요."
"어머님, 시간이 지나면 시효 문제도 있습니다. 빨리 진행하시는 게 유리합니다."
집에 돌아와서 태호와 이야기했다. 밤새 이야기했다.
적금 2,000만 원이 남아 있었다. 수진의 결혼자금이었다. 거기서 345만 원을 빼면 1,655만 원. 원래 7,200만 원이던 전 재산이 1,655만 원이 된다.
"돈을 돌려받을 수 있다면..."
태호가 말했다. 정숙은 알고 있었다. 태호도 알고 있었다. '가능하다'는 말과 '확실하다'는 말은 다르다는 것을. 하지만 18,240원이 전부라는 현실보다는, 소송이라도 하는 편이 덜 절망적이었다.
다음 날, 정숙은 적금 통장에서 345만 원을 출금했다. 은행 창구 직원이 물었다.
"적금 중도해지 수수료가 발생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네."
법률사무소에 전화했다. 사무관이 받았다.
"어머님, 잘 결정하셨습니다. 소장 접수 준비하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정숙은 가계부에 한 줄을 더 적었다.
변호사 착수금 + 소송비용: -345만 원.
가계부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범죄자에게 3,700만 원을 잃었고, 이제 그 돈을 되찾기 위해 345만 원을 더 쓴다. 돈을 잃고, 돈을 되찾으려 돈을 쓴다.
정숙은 아직 몰랐다. 이 345만 원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3,700만 원을 되찾으려
345만 원을 더 잃었다
다음 편에서 재판이 시작된다. 판사는 말한다. "원고에게도 과실이 있다." 승소해도 돈은 돌아오지 않고, 패소하면 변호사비만 남는다. 그리고 사무관의 전화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