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ice phishing — fiction 04
삶은 계속된다
모든 것을 잃을 뻔했지만, 엄마의 멘탈이 가족을 지탱한다
항소 기각 후 2개월.
정숙은 부엌 식탁에 앉아 가계부를 정리했다. 형광등 불빛 아래, 파란색 볼펜으로 한 줄 한 줄 적었다. 숫자를 정확하게 알아야 다음으로 갈 수 있었다.
| 항목 | 금액 |
|---|---|
| 예금 인출 (범죄자) | -3,200만 원 |
| 카드론 실행 (범죄자) | -500만 원 |
| 변호사 착수금 (1심) | -330만 원 |
| 인지대 + 송달료 (1심+항소) | -30만 원 |
| 카드론 이자 (24개월) | -52만 원 |
| 적금 중도해지 수수료 | -3만 원 |
| 금감원 환급금 | +18,240원 |
| 판결 인용금 (집행불능) | +0원 |
| 총 손실 | -4,113만 원 |
| 남은 재산 (적금 잔액) | 1,655만 원 |
정숙은 마지막 줄을 적고 펜을 내려놓았다.
7,200만 원이 1,655만 원이 되었다. 5개월 만에. 거기에 카드론 매월 상환금 23만 원이 앞으로 20개월 남았다.
하지만 정숙은 "4,113만 원을 잃었다"고 적지 않았다. 가계부 맨 아래에 이렇게 적었다.
남은 돈: 1,655만 원. 이건 수진이 결혼할 때 쓸 거다.
이것이 정숙의 방식이었다. 없어진 것을 세는 대신, 남은 것을 세는 방식. 태호가 부엌으로 들어와 어깨 너머로 가계부를 보았다.
"정숙아."
"응."
"... 미안하다."
"뭐가."
"내가 더 일찍 알았으면."
정숙이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알았어도 마찬가지였어. 딸이 울면서 전화하는데 누가 의심해."
태호가 아무 말 없이 물을 한 잔 따라 식탁에 놓았다. 정숙이 물을 마셨다. 부엌 시계가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수진은 자신을 탓했다.
인스타그램에 올린 릴스 영상. 카페에서 친구와 웃으며 이야기하는 15초 영상. 한강 러닝하면서 찍은 브이로그. 회사 야유회에서 찍은 셀카. 그 영상들에서 범죄 조직이 목소리를 추출했다.
3초. 엄마에게는 28년이었지만, AI에게는 3초면 충분했다.
수진은 인스타그램 계정을 삭제했다. 팔로워 1,200명이 사라졌다. 유튜브에 올렸던 일상 브이로그도 내렸다. 틱톡도 삭제했다. 목소리가 담긴 모든 콘텐츠를 지웠다.
"엄마,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영상을 안 올렸으면..."
"수진아."
"응."
"그러면 친구한테 전화하는 것도 네 잘못이야? 회사에서 발표하는 것도? 카페에서 주문하는 것도?"
수진이 입을 다물었다.
"네 목소리가 그렇게 비싼 줄 몰랐네."
정숙이 웃었다. 수진이 울었다.
수진은 그 달부터 월급의 일부를 엄마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매달 50만 원. 엄마의 카드론 상환금 23만 원보다 많았다. 정숙은 거절했다.
"네 돈은 네가 써. 엄마가 잃은 거지, 네가 잃은 게 아니야."
"엄마..."
"진짜야. 그 돈으로 맛있는 거 사 먹어. 아니면 저축해. 네 결혼자금은 엄마가 따로 모을 거야."
수진이 물었다.
"어떻게?"
정숙이 대답했다.
"일하면 되지."
반찬가게는 정숙의 아이디어였다.
중계동 아파트 단지 입구에 작은 가게가 비었다. 월세 45만 원. 보증금 500만 원은 태호의 사업 통장에서 빌렸다. 간판은 태호가 직접 만들었다. 인테리어 사무소 대표의 유일한 장점은 간판 만드는 데 돈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정숙네 반찬." 흰 바탕에 검은 글씨. 소박했다.
정숙은 김치를 잘 담갔다. 30년 경력이었다. 시어머니에게 배운 방식 그대로. 겉절이, 갓김치, 총각김치. 거기에 장조림, 어묵볶음, 잡채.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재료를 손질했다.
이웃이 물었다.
"정숙 씨, 요즘 얼굴이 좀 좋아 보이네?"
"앉아서 울고 있으면 뭐 해. 서서 일하는 게 낫지."
정숙의 멘탈은 화려하지 않았다. 자기계발서에 나오는 '마인드셋 전환'이나 '긍정의 힘'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냥 단순했다.
카드론은 매달 23만 원씩 갚으면 된다. 반찬가게 수익에서 충분히 나온다.
적금 1,655만 원은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 수진이 결혼할 때 쓸 돈이다.
울어도 배추는 담가야 한다. 김치는 울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양념이 마르기 전에 발라야 한다.
어느 날, 노원구청에서 보이스피싱 예방 교육 봉사자를 모집한다는 안내문을 보았다. 정숙은 전화를 걸었다.
"저도 신청할 수 있나요? 저... 직접 당한 사람인데요."
"아, 네. 오히려 실제 피해 경험이 있으신 분이 교육 효과가 높습니다."
정숙은 노인정과 복지관에서 한 달에 두 번씩 강의를 했다. 파워포인트도 모르고, 마이크 잡는 것도 서툴렀다. 하지만 이야기는 했다.
"딸이 울면서 전화했어요. 28년 동안 들어온 딸의 목소리였어요. 근데 가짜였어요."
노인정의 어르신들이 조용해졌다.
"전화 받으면, 끊으세요. 그리고 직접 걸어보세요. 자녀한테. 직접."
어르신 한 분이 물었다.
"돈은 돌려받았어요?"
정숙이 웃었다.
"18,240원 받았어요."
아무도 웃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픽션이다. 하지만 숫자는 실제다.
- 3,700만 원 — 예금 인출 + 카드론
- AI 3초면 복제되는 가족의 목소리
- "112에 전화하면 안전하다"는 상식
- 연간 피해 1조 2,578억 원
- 건당 평균 5,384만 원
- 피해금 환급률 26~33%
- 변호사 착수금 330만 원
- 소송비용(인지대+송달료) 30만 원
- 카드론 이자 52만 원
- 결과와 무관하게 100% 선납
- "원고에게도 과실 40%가 있다"
- "항소를 기각한다"
- 집행 재산 없음 → 회수 0원
- 사무관: "상고 착수금 300만 원"
(범죄+법률+이자)
(원)
(딸의 미래)
범죄자는 3,700만 원을 훔쳤다. 변호사는 345만 원을 받고 아무것도 돌려주지 못했다. 사무관은 패소 직후 다음 소송을 권유했다. 법은 피해자에게 "과실이 있다"고 말했다.
피해자 박정숙에게 남은 것은 적금 1,655만 원과 카드론 20개월과 반찬가게 하나다.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다.
어느 날 저녁, 반찬가게 정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정숙은 핸드폰을 보았다.
3초.
정숙은 3초 동안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5개월 전이었다면 아무 생각 없이 받았을 것이다. 딸의 이름이 뜨면 반사적으로 손이 가던 시절. 지금은 3초가 필요하다. 딸의 이름을 보고, 숨을 쉬고, 받는다.
전화를 받았다.
"엄마, 나야. 오늘 저녁에 갈게. 뭐 해놨어?"
정숙은 목소리를 들었다. 딸의 목소리였다. 5개월 전에도 딸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번에는 알 수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엄마는 안다. 28년이 3초와 다르다는 것을. AI는 음성을 복제할 수 있다. 어투도, 억양도, 울음 섞인 목소리도. 하지만 엄마의 직감까지 복제할 수는 없다.
그날 이후, 정숙은 딸의 전화를 받기 전에 항상 3초를 멈춘다. 3초 동안 숨을 쉰다. 그리고 받는다. 이것이 4,113만 원의 교훈이다. 비싼 교훈이었지만, 정숙은 그것을 교훈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 김치찌개."
"맛있겠다! 30분이면 가!"
전화를 끊었다. 정숙은 냉장고를 열었다. 김치를 꺼냈다. 5개월 전, 반쯤 담다 멈췄던 그 김치가 아니었다. 반찬가게에서 매일 담그는 김치였다. 손이 기억하는 김치. 시어머니가 가르쳐준 김치.
냄비에 물을 올렸다. 두부를 깍둑썰기했다. 파를 썰었다.
현관문이 열렸다. 수진이 들어왔다. 손에는 딸기 한 팩이 들려 있었다.
"엄마!"
"어, 왔어."
수진이 부엌으로 들어와 엄마 옆에 섰다. 딸기를 씻기 시작했다.
"가게는 오늘 어땠어?"
"김치가 다 나갔어. 내일 더 담가야 해."
"대박이네."
"대박은 무슨. 배추 값이 올라서 마진이 안 남아."
수진이 웃었다. 정숙도 웃었다.
부엌에 김치찌개 냄새가 퍼졌다. 딸기가 씻겨져 접시에 놓였다. 태호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 수진이 왔네." 세 사람이 식탁에 앉았다.
평범한 저녁이었다. 5개월 전까지는 당연했던, 지금은 당연하지 않은, 그래서 더 소중한 저녁.
삶은 계속된다.
3초면 복제할 수 있다
28년은 복제할 수 없다
이 시리즈의 모든 수법, 법률 절차, 환급 금액, 과실비율은 실제 데이터와 판례에 기반합니다. 가족에게 전화가 올 때, 3초만 멈추세요. 끊고, 직접 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