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ice phishing — fiction 01
여보세요
AI가 복제한 딸의 목소리, 47분 만에 사라진 3,700만 원
김치를 담그고 있었다.
배추 열두 포기. 시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배운 방식 그대로, 이파리 한 장 한 장 사이에 양념을 바르는 중이었다. 라텍스 장갑 너머로 고춧가루의 붉은빛이 비쳤다. 라디오에서는 교통 정보가 흘러나왔고, 베란다 너머로 중계동 아파트 단지의 오후가 조용히 지나가고 있었다.
정숙은 장갑을 벗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카카오톡을 열어 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수진아 오늘 저녁 올 수 있어? 김치 담갔다"
읽음 표시가 뜨지 않았다. 회사에서 바쁜 모양이었다. 정숙은 핸드폰을 식탁에 내려놓고 다시 배추를 집어 들었다.
박정숙의 세계는 단순했다. 남편 김태호는 노원역 근처에서 작은 인테리어 사무소를 운영했다.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부족하지도 않았다. 예금 5,200만 원, 적금 2,000만 원. 합계 7,200만 원. 전 재산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딸의 결혼자금이었다.
수진은 스물여덟이었다. 강남의 IT 회사에 다녔고, 아직 결혼할 생각은 없다고 했지만, 정숙은 알고 있었다. 딸이 최근 만나는 남자가 있다는 것을. 통장의 숫자를 볼 때마다 정숙은 딸의 웨딩드레스를 상상했다.
오후 2시 43분. 배추 여덟 번째 포기에 양념을 바르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 이름을 보았다.
정숙은 장갑을 벗으며 전화를 받았다.
"수진아, 카톡 봤어? 오늘 저녁에 —"
딸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울고 있었다.
"엄마..."
정숙의 손이 멈추었다.
"엄마, 나 지금 큰일 났어."
딸이 우는 소리를 들으면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다. 28년 동안 단 한 번도 예외가 없었다.
"무슨 일이야? 수진아, 왜 울어?"
"회사에서... 회사 계좌로 이상한 돈이 들어왔대. 근데 그게 내 이름으로 처리가 돼 있어. 검찰에서 연락이 왔어."
"검찰? 무슨 소리야?"
"엄마, 나 어떡해. 담당 수사관이 지금 통화 연결해준다고 했어. 엄마한테도 확인할 게 있대."
수화기 너머로 잡음이 섞였다. 2초쯤 지났을까. 낮고 차분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숙은 이름과 생년월일을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우리 수진이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어요!"
정숙은 몰랐다. 이 순간 자신이 듣고 있는 '수진'의 목소리가, 딸이 인스타그램 릴스에 올린 15초 영상에서 추출한 3초 분량의 음성을 AI가 학습하여 합성한 것이라는 사실을.
정숙은 몰랐다. 서울중앙지검 대표번호 02-3480은 실제 번호이며, 화면에 표시된 발신번호가 위조되었다는 사실을.
정숙은 몰랐다. 지금부터 47분 동안, 자신의 전 재산의 절반이 증발하게 된다는 사실을.
사건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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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7
'수사관'이 보낸 링크를 클릭. "금융보안원 공식 앱"이라는 설명과 함께 APK 파일이 다운로드된다. 정숙은 '설치'를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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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8
앱이 접근성 권한, 전화 권한, SMS 권한, 화면 오버레이 권한을 요청한다. 수사관이 "모두 허용해주셔야 검사가 가능합니다"라고 말한다. 정숙은 모두 허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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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9
핸드폰이 완전히 장악된다. 이 순간부터 정숙이 거는 모든 전화는 범죄 조직으로 연결된다. 112도, 1332도, 은행 고객센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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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2
"계좌 안전성 검증을 위해 뱅킹 앱을 열어주십시오." 정숙이 국민은행 앱을 연다. 화면이 혼자 움직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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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5
"지금 화면에 보이는 것은 자동 보안 검사입니다. 절대 터치하지 마십시오." 화면 위에서 누군가가 계좌 이체 메뉴를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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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8
"비밀번호 입력이 필요합니다. 본인 확인을 위해 직접 입력해주십시오." 정숙이 6자리 비밀번호를 입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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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1
1차 이체: 1,200만 원. 예금 계좌에서 알 수 없는 계좌로. 정숙의 핸드폰에는 이체 알림이 오지 않는다. 악성앱이 SMS를 차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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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6
2차 이체: 2,000만 원. 같은 예금 계좌에서 다른 계좌로. 잔액이 급격히 줄어들지만 정숙은 모른다. 화면은 '보안 검사 진행 중'이라는 가짜 화면으로 덮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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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4
"추가 검증이 필요합니다. 신용카드 정보를 확인하겠습니다." 정숙의 핸드폰에서 카드론 메뉴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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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9
카드론 실행: 500만 원. 정숙의 신용카드 한도 전액이 현금 대출로 전환된다. 대출금은 즉시 타행 계좌로 이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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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7
"검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이상 없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전화가 끊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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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4
핸드폰 화면이 정상으로 돌아온다. 정숙은 안도의 한숨을 쉰다.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정숙은 다시 배추를 집어 들었다.
딸이 무사하다니 다행이었다. 검찰이 알아서 처리해줄 것이다. 양념을 바르는 손이 조금 떨렸지만, 그것은 아까 놀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아홉 번째 포기, 열 번째 포기. 김치통에 배추를 차곡차곡 눌러 담았다.
남편에게 전화했다.
"여보, 오늘 수진이한테 전화 왔었어.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봐. 검찰에서 연락이 왔다는데..."
"검찰? 무슨 검찰?"
"자금 세탁인가 뭔가... 근데 수사관이 검사해보니까 이상 없대."
전화기 너머로 남편의 침묵이 길어졌다.
"정숙아. 그거 혹시..."
"왜?"
"앱 같은 거 설치했어?"
정숙의 손이 멈추었다. 배추에서 양념이 뚝 떨어졌다.
"... 보안 검사 앱을 설치하라고 해서..."
"지금 바로 은행 앱 열어봐. 잔액 확인해."
정숙은 장갑을 벗었다. 핸드폰을 들었다. 국민은행 앱을 열었다.
예금 잔액이 표시되었다.
잔액 47,320원
아침까지 5,200만 원이 있던 통장이었다.
정숙은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바닥에 부딪힌 핸드폰 위로 고춧가루 묻은 손자국이 남았다.
"여보... 돈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저녁 7시 14분. 현관문이 열렸다.
수진이었다. 퇴근길에 들른 것이다. 손에는 떡볶이가 들려 있었다. 카톡에 김치 담갔다는 메시지를 보고, 떡볶이랑 같이 먹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엄마, 나 왔어! 엄마?"
부엌 불이 꺼져 있었다. 거실 소파에 엄마가 앉아 있었다. 아버지도 옆에 앉아 있었다. 둘 다 아무 말이 없었다. 식탁 위에 배추가 반쯤 담긴 채 그대로였고, 양념이 마르고 있었다.
"... 엄마, 왜 그래? 아빠도 왜 이렇게 일찍 와 있어?"
정숙이 딸을 올려다보았다.
"수진아."
"응?"
"오늘 낮에 나한테 전화했지?"
수진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전화? 나 오늘 전화 안 했는데? 카톡은 봤는데 회의 중이라 답장 못 했어."
3초.
그 3초 동안 정숙의 얼굴에서 마지막 남은 희망이 빠져나갔다. 남편이 이미 설명한 것을, 남편이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확인한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아직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을, 딸의 입에서 직접 들었다.
나 오늘 전화 안 했는데.
정숙이 소파에서 일어서려 했다. 다리에 힘이 없었다. 수진이 떡볶이를 내려놓고 달려왔다.
"엄마! 엄마 왜 그래?"
정숙이 딸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진짜 딸의 손이었다.
"수진아..."
"응, 엄마. 나 여기 있어."
"네 목소리로... 전화가 왔었어."
수진의 표정이 변했다. 떡볶이 봉투를 든 손이 축 늘어졌다.
남편 태호가 입을 열었다. 하루 종일 검색하고, 은행에 전화하고, 112에 신고한 뒤 집에 와서 아내 옆에 앉아 딸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이스피싱이다. AI로 목소리를 복제해서... 엄마한테 전화한 거야."
"... 얼마?"
태호가 말했다.
"3,200만 원. 거기다 카드론 500만 원."
수진의 얼굴이 하얘졌다.
"3,700만 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거실에 떡볶이 냄새만 퍼졌다.
수진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엄마 옆에. 엄마의 손을 잡은 채로.
"내 목소리로...?"
정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100% 너였어. 울음소리까지. 엄마가 28년 동안 들어온 네 목소리였어."
수진이 울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진짜 울음이었다.
수진의 인스타그램에는 영상이 23개 있었다.
회사 야유회에서 찍은 셀카 영상. 카페에서 친구와 수다 떠는 브이로그. 한강 러닝 인증 릴스. 각각 15초에서 60초. 목소리가 선명하게 담겨 있었다.
범죄 조직에게는 그중 3초면 충분했다.
최소 샘플 길이
완료까지 소요 시간
총 피해금액
마이크로소프트가 2023년에 공개한 VALL-E는 3초의 음성 샘플만으로 특정인의 목소리를 복제할 수 있다. "여보세요" 한 마디면 된다. 어투, 억양, 감정까지. 울음 섞인 목소리도 합성할 수 있다. 2026년 현재, 이 기술은 더 정교해졌고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악성 앱이 설치된 순간, 정숙의 핸드폰은 범죄 조직의 것이 되었다. 전화 가로채기, 원격 화면 제어, SMS 차단, 뱅킹 앱 조작. 정숙이 불안해서 112에 전화를 걸어도 범죄 조직이 받았다. "네, 서울중앙지검에서 수사 중인 건으로 확인됩니다." 정숙은 공식 기관에 확인까지 마쳤다고 안심했다.
2025년, 대한민국의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1조 2,578억 원을 기록했다. 역대 최대. 건당 평균 피해액 5,384만 원. 피해금 환급률은 30%를 밑돈다. 10명이 당하면 7명은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한다.
정숙은 그 7명 중 한 명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모른다.
아직은, 딸의 손을 잡고 거실 소파에 앉아 있을 뿐이다.
수진이 돌아간 뒤, 정숙은 부엌으로 갔다.
반쯤 담긴 김치가 그대로 있었다. 양념이 마르기 시작한 배추 위에 파리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정숙은 파리를 쫓고, 장갑을 끼고, 아홉 번째 포기를 집어 들었다.
배추 이파리 사이에 양념을 발랐다. 손이 떨렸다. 양념이 고르게 발리지 않았다. 다시 발랐다. 또 떨렸다. 세 번째에 겨우 한 장을 마쳤다.
열 번째 포기. 열한 번째. 열두 번째.
자정이 넘어서 마지막 포기를 김치통에 눌러 담았다. 뚜껑을 닫고, 냉장고에 넣었다.
싱크대에 기댄 채 정숙은 부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내일 경찰서에 가야 한다. 태호가 그렇게 말했다. 피해사실확인서를 받아야 한다고. 금감원에도 신고해야 한다고. 은행에도 서류를 내야 한다고.
3,700만 원.
수진이 결혼자금의 절반이었다.
정숙은 싱크대 수도꼭지를 틀었다. 장갑을 벗고, 손을 씻었다. 고춧가루가 손톱 사이에 남아 있었다. 아무리 씻어도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날 오후, 핸드폰을 떨어뜨렸을 때 묻은 고춧가루 손자국이 아직 화면에 남아 있었다. 정숙은 그것을 닦지 않았다. 어차피 그 핸드폰은 내일 경찰서에 가져가야 했다.
불을 끄고 방으로 들어갔다. 태호는 잠들어 있었다. 아니, 잠든 척하고 있었다. 정숙은 알고 있었다. 28년을 같이 살았으니까.
이불을 덮었다. 천장을 보았다. 눈을 감았다.
그때 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엄마, 나 지금 큰일 났어."
정숙은 눈을 떴다.
그 목소리가 가짜였다는 것을 머리로는 안다. 하지만 귀는 아직도 기억한다. 완벽하게 딸의 목소리였다. 28년 동안 들어온 그 목소리. 울음 섞인 그 목소리.
3초면 복제할 수 있다고 했다.
28년을 3초로 속일 수 있다고 했다.
정숙은 옆으로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새벽 4시까지 잠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경찰서로 갔다.
그곳에서 정숙은 알게 된다. 돈을 잃는 것은 시작일 뿐이라는 것을.
28년의 목소리를
3초로 훔쳤다
다음 편에서 정숙은 자신의 돈을 되찾으러 간다. 경찰서, 금감원, 은행, 법률사무소. 자기 돈인데 자기가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