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 fiction 01
배당일
2032년 3월 1일. AI가 벌어온 돈이 입금되는 날.
서울, 라고스, 리야드 — 같은 날, 다른 금액.
알람 소리가 아니라 진동에 깼다. 정해민은 이불 속에서 손을 뻗어 스마트폰을 더듬었다. 화면에 익숙한 알림이 떠 있었다.
삼백팔십사만 칠천 원. 해민은 숫자를 한국 원으로 환산하는 습관을 아직 버리지 못했다. 2029년에 소버린 배당이 달러 기준으로 통일된 뒤로도,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원화가 먼저 떠올랐다.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수진은 이미 일어난 모양이다. 거실에서 커피 내리는 소리가 났다. 해민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하얀 천장. 매일 아침 같은 천장. 출근하지 않는 아침은 3년째인데, 천장을 올려다보는 횟수는 줄지 않았다.
한때 해민은 삼성전자 반도체 설계팀의 시니어 엔지니어였다. 20년차. 5나노 공정 설계를 이끌었고, 후배들이 "해민 선배"를 찾았다. 2029년, 한국 소버린 AI "아리랑"이 반도체 설계 모듈을 본격 가동했을 때, 처음에는 보조 도구라고 했다. 6개월 뒤 설계팀은 해산되었다. "아리랑"이 30초 만에 해민이 3주 걸리던 설계를 완료했기 때문이 아니다. 30초 만에 해민보다 더 나은 설계를 완료했기 때문이다.
반도체 설계 라이선스
K-콘텐츠 생성/번역
2032년 1분기
화장실 거울 앞에서 양치를 하며 해민은 생각했다. 380만 원이면 충분하다. 아파트 관리비, 식비, 하은이 학원비 — 학원이라고 할 것도 없다, AI 튜터의 월정액이다 — 를 빼면 200만 원이 남는다. 여행을 가도 되고, 책을 사도 되고,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3년째 이 문장이 해민을 짓누르고 있었다.
거실로 나가자 수진이 커피 두 잔을 식탁에 놓고 있었다.
"얼마 들어왔어?" 수진이 물었다.
"삼팔사칠. 전달보다 좀 올랐어."
"아리랑이 TSMC 경쟁 입찰 따냈다고 뉴스에 나왔더라. 그래서 그런가 봐."
해민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예전에는 출근길에 마시던 커피였다. 지하철에서, 엘리베이터에서, 책상 위에서. 지금은 이 식탁이 커피의 유일한 장소다.
스마트폰이 울렸다. 영상통화 알림. 화면에 Adekunle Okafor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해민과 아데쿤레는 2027년에 만났다. 삼성이 나이지리아 라고스에 데이터 레이블링 센터를 열었을 때, 아데쿤레는 그곳에서 AI 학습 데이터에 태그를 붙이는 일을 했다. 해민이 설계 검증용 데이터셋을 요청할 때마다 아데쿤레가 담당했다. 영어와 번역기를 섞어가며 나눈 대화가 어느새 5년이 되었다.
영상이 연결되자 아데쿤레의 얼굴이 나타났다. 배경은 비좁은 방. 벽에 금이 가 있었다.
"해민, 배당일이야. 얼마 받았어?"
"삼팔사칠."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우리는 구십사 달러."
나이지리아의 소버린 AI "오건"은 자체 인프라가 없었다. 미국 하이퍼스케일러의 GPU를 임대하고, 프랑스 미스트랄의 모델을 라이선스하고, 사우디 데이터센터에 연산을 위탁했다. 벌어들이는 돈보다 인프라 임대료가 더 클 때가 많았다. 국민 2억 3천만 명에게 돌아가는 몫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구십사 달러로는 한 달 식비도 안 돼." 아데쿤레의 목소리가 담담했다. 분노보다는 체념에 가까운 톤. "예전에 데이터 레이블링할 때가 나았어. 적어도 내가 일해서 번 돈이었으니까."
해민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데쿤레가 태그를 붙였던 바로 그 데이터로 학습한 AI가, 아데쿤레의 일자리를 없앴고, 그 AI가 벌어들이는 돈은 아데쿤레에게 월 94달러로 돌아간다. 데이터를 제공한 사람에게 돌아가는 몫이 가장 적다는 사실을 해민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있잖아 해민, 라고스에서는 배당일이라고 안 불러."
"뭐라고 불러?"
"'잔돈의 날'이라고 불러."
"같은 지구에 산다.
같은 날 배당을 받는다.
한쪽은 $3,847, 다른 쪽은 $94."
통화를 끊은 뒤 해민은 한동안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배당 앱의 "글로벌 소버린 배당 비교" 탭을 열었다. 실시간으로 각국의 배당이 주식 시세처럼 흐르고 있었다.
"나킬" · 에너지 트레이딩
"리버티" · 금융 + AGI 연구
"아리랑" · 반도체 + K-콘텐츠
"무사시" · 로봇공학
"마리안느" · 군사 + 문화
"오건" · 임대 인프라
석유 시대에도 이랬다. 원유를 가진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 21세기의 석유는 GPU였고, GPU를 가진 나라가 배당의 크기를 결정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자원의 이름만 바뀌었을 뿐.
수진이 퇴근했다. 정확히 말하면 "로그아웃"했다. 수진의 직업은 AI 콘텐츠 감정 튜너다. "아리랑"이 생성한 K-드라마 대본의 감정 곡선을 인간이 미세 조정하는 일이다. AI가 만든 대사는 문법적으로 완벽하지만, 가끔 한국인이 느끼기에 "어색한" 감정 전환이 있다. 그 지점을 찾아 조율하는 것이 수진의 일이었다.
"오늘 몇 편 했어?"
"열두 편. 다 16부작이야. 아리랑이 한 편 생성하는 데 40초. 내가 감정 튜닝하는 데 두 시간." 수진이 신발을 벗으며 말했다. "근데 있잖아, 요즘 튜닝할 게 점점 줄어. 아리랑이 내 수정 패턴을 학습해서 미리 반영하거든."
수진은 자신의 일자리에 유효기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6개월, 길어야 1년. AI가 한국인의 감정 패턴을 완벽하게 학습하면 수진도 해민처럼 집에 있게 될 것이다.
저녁 식사 중에 딸 하은이 물었다. 열여섯 살. AI 튜터에게 수학과 국어를 배우고, 가상 교실에서 또래 아이들과 토론을 했다.
"아빠, 엄마, 왜 예전 사람들은 매일 같은 곳에 갔어?"
해민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회사라는 곳이 있었어. 아침에 가서 저녁에 돌아왔어."
"매일?"
"매일."
"왜?"
해민은 수진을 바라보았다. 수진도 해민을 바라보았다. 둘 다 대답을 찾지 못했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는 답은 정확하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돈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동료, 성취감, 일상의 구조, 퇴근 후 맥주의 맛. 그런 것들을 열여섯 살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습관이었어." 해민이 말했다.
"나쁜 습관이었어?" 하은이 고개를 갸웃했다.
해민은 웃었다. 쓴 웃음이었다.
"아니. 좋은 습관이었어. 아마도."
수진과 하은이 잠든 뒤, 해민은 서재로 들어갔다. 서재라고 해봐야 방 한쪽 구석에 놓인 책상과 모니터 하나다. 해민은 컴퓨터를 켰다.
바탕화면에 아이콘 하나가 있다. Cadence Virtuoso. 반도체 회로 설계 프로그램. 해민이 20년간 써온 도구다. 삼성을 떠난 뒤 개인 라이선스를 유지하고 있다. 매달 배당에서 30만 원이 빠져나간다. 수진은 "그 돈이면 여행 가자"고 했지만, 해민은 한 번도 해지하지 않았다.
프로그램을 열었다. 빈 캔버스. 해민은 3나노 공정 기반의 프로세서 코어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라인을 그리고, 트랜지스터를 배치하고, 배선을 연결했다. 손가락이 기억하는 동작들. 근육이 기억하는 리듬.
두 시간이 지났다. 새벽 1시 47분. 해민은 자신이 설계한 코어를 바라보았다. 나쁘지 않았다. 20년 경력의 시니어 엔지니어가 두 시간 동안 집중해서 만든 설계.
그리고 해민은 옆 창에서 "아리랑"의 반도체 설계 모듈을 열었다. 동일한 사양을 입력했다. 3나노 공정, 같은 ISA, 같은 전력 예산.
27초.
"아리랑"이 27초 만에 결과를 내놓았다. 해민은 두 설계를 나란히 놓았다. "아리랑"의 설계가 트랜지스터를 12% 적게 사용했고, 예상 전력 소비가 8% 낮았고, 클럭 속도는 3% 높았다.
해민은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왼쪽에 자신의 2시간, 오른쪽에 "아리랑"의 27초. 모든 수치에서 "아리랑"이 앞섰다.
그런데 해민은 프로그램을 닫지 않았다.
대신 새 캔버스를 열었다. 이번에는 사양 없이, 목적 없이, 그냥 그리기 시작했다. 라인 하나, 트랜지스터 하나, 배선 하나. 최적화와 무관한, 효율과 무관한, 그냥 손이 가는 대로의 회로. 아무도 제조하지 않을 회로. 아무 기기에도 들어가지 않을 회로.
해민의 손끝에서 실리콘 위의 풍경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트랜지스터가 강을 이루고, 배선이 다리를 놓고, 논리 게이트가 도시를 세웠다. 반도체 설계자만이 볼 수 있는, 나노미터 단위의 풍경화.
새벽 3시. 해민은 파일을 저장했다. 파일명은 landscape_0301.gds.
해민은 모니터를 껐다. 어둠 속에서 의자에 기대앉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아침과 같은 천장. 하지만 어둠 속의 천장은 조금 달랐다. 무언가를 만든 뒤의 천장이었다.
내일 아침에도 배당 앱의 숫자를 확인하겠지. $3,847.23은 아닐 것이다. 매일 바뀌는 숫자. 아리랑의 실적에 따라, 세계 반도체 시장에 따라, AI 콘텐츠 수출량에 따라.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들어오는 돈.
그런데 방금 2시간 동안, 아무 소용없는 회로를 그린 그 시간만큼은, 돈과 무관한 무언가가 있었다. "아리랑"에게 27초 만에 질 수밖에 없는 손이, 그래도 그리기를 멈추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해민은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 이름 붙이지 못했다.
"아리랑"은 27초 만에 더 나은 설계를 내놓는다.
해민은 두 시간 걸려 더 못한 설계를 만든다.
그런데 해민은 멈추지 않는다.
창밖으로 서울의 야경이 보였다. 3월의 새벽 공기가 창틈으로 스며들었다. 어딘가에서 드론 배송의 프로펠러 소리가 잠깐 들리다 사라졌다.
내일은 3월 2일이다. 배당일의 다음 날. 특별할 것 없는 하루. 해민은 아마 늦게 일어나서, 커피를 마시고, 뉴스를 보고, 산책을 하고, 저녁에 수진과 하은이와 밥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밤이 되면 다시 서재에 앉아 아무도 제조하지 않을 회로를 그릴 것이다.
그것이 정해민의 하루다. 2032년, 소버린 배당의 시대에.
AI는 일을 대신한다
의미까지 대신하지는 못한다
이 이야기는 허구다. 하지만 소버린 AI와 기본소득 논의는 현실이다. 다음 편에서는 국가 간 AI 패권 경쟁을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