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vereign — philosophy 05

일하지 않는 인간

케인즈는 주 15시간을 예언했다. 그레이버는 쓸모없는 일자리를 고발했다.
아렌트는 '행위'를 말했다. AI가 노동을 대신할 때, 인간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Part I — The Prophecy

케인즈가 틀린 이유, 그리고 맞는 이유

1930년,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에세이 한 편을 발표했다. "우리 손주 세대의 경제적 가능성(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 핵심 주장은 단순했다. 기술이 충분히 발전하면, 인간은 주 15시간만 일하게 된다. 나머지 시간은 예술, 철학, 여가에 쓴다. 100년 후 — 2030년 — 의 이야기였다.

케인즈의 예측은 절반만 맞았다. 기술은 그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발전했다. 2025년 기준, 세계 GDP는 1930년의 실질 6배다. 생산성은 400% 이상 증가했다. 기술적으로는 주 15시간 노동이 이미 가능하다. 문제는 사회가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왜 선택하지 않았는가. 여기서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등장한다.

그레이버는 2018년 저서 "불쉿 잡(Bullshit Jobs)"에서 충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기술 발전이 노동을 줄이지 않은 이유는, 사회가 의도적으로 무의미한 일자리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기업 내 중간 관리자, 보고서를 위한 보고서를 쓰는 분석가, 규정 준수를 위해 존재하는 컴플라이언스 팀. 그레이버의 추산에 따르면 전체 일자리의 37~40%가 본인조차 "내 일이 사라져도 세상에 아무 영향이 없다"고 인정하는 불쉿 잡이다.

"자유 시간을 즐기는 사람들은
권력에게 치명적인 위협이다."

David Graeber · Bullshit Jobs (2018)

그레이버의 통찰은 냉소적이지만 정확하다. 노동은 경제적 필요를 넘어 사회적 통제 장치로 기능한다. 사람들을 바쁘게 만들면 현 체제에 의문을 제기할 여유가 사라진다. 케인즈의 주 15시간이 실현되지 않은 것은 기술의 한계가 아니라, 권력 구조의 선택이었다.

그런데 AI가 이 구도를 무너뜨리고 있다.

이전의 자동화는 공장 노동자를 대체했다. 육체노동이 사라진 자리에 사무직이 생겼고, 사무직 중 상당수가 그레이버가 말한 불쉿 잡이었다. AI는 다르다. AI는 불쉿 잡마저 대체한다. 중간 관리자의 보고서 요약, 컴플라이언스 문서 작성, 이메일 분류와 회의록 정리. 이런 일들은 대형 언어 모델이 수 초 만에 처리한다. 무의미한 일자리를 만들어서라도 사람들을 고용하던 시스템이,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2024년, 영국에서 61개 기업이 주 4일 근무 실험에 참여했다. 급여 삭감 없이 근무일을 하루 줄였다. 결과는 놀라웠다. 참여 기업의 92%가 실험 종료 후에도 주 4일제를 유지하기로 했다. 매출은 평균 1.4% 상승했다. 이직률은 57% 감소했다. 케인즈의 예언이 100년 만에 작은 규모로 증명된 셈이다.

하지만 주 4일은 시작에 불과하다. WEF(세계경제포럼)의 2025년 보고서에 따르면, 고용주의 41%가 2030년까지 인력 축소를 계획하고 있다. Anthropic CEO 다리오 아모데이는 "화이트칼라 초급 일자리의 절반이 1~4년 내 사라진다"고 전망했다. 주 15시간이 아니라, 주 0시간이 현실적 시나리오로 떠오르고 있다.

케인즈는 기술이 인간을 해방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레이버는 사회가 그것을 막고 있다고 고발했다. 그리고 AI는 — 사회가 막든 말든 — 해방을 강제하고 있다. 문제는, 해방된 인간이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Part II — The Three Activities

아렌트의 세 가지 활동

한나 아렌트는 1958년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에서 인간의 활동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 이 구분은 66년이 지난 지금, AI 시대에 가장 강력한 분석 프레임이 된다.

category 01
노동
Labor

생물학적 필요를 충족하는 반복 활동.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출퇴근을 하고, 서류를 정리한다. 결과물이 소비되면 사라진다. 끝없이 반복된다.

AI 대체 가능성: 완전
category 02
작업
Work

지속되는 사물을 만드는 활동. 건물을 짓고, 책을 쓰고, 도구를 제작한다. 결과물은 제작자보다 오래 남는다. 세계에 영속적인 무언가를 추가한다.

AI 대체 가능성: 부분적
category 03
행위
Action

타인 사이에서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활동. 말하고, 약속하고, 용서하고, 혁명을 일으킨다. 예측 불가능하고, 되돌릴 수 없으며, 결과를 통제할 수 없다.

AI 대체 가능성: ?

노동부터 보자. 아렌트가 말한 노동은 생존을 위한 반복이다. 먹고 자고 씻는 것의 연장선. 현대의 대부분 직업이 여기에 해당한다. 데이터 입력, 이메일 응대, 재고 관리, 운전. AI는 이 영역을 거의 완전히 대체할 수 있다. 실제로 대체하고 있다. 자율주행이 운전을 대체하고, 챗봇이 고객 응대를 대체하고, 소버린 AI가 국가 행정의 상당 부분을 자동화한다.

작업은 더 복잡하다. 아렌트의 작업은 "호모 파베르(Homo Faber)" — 만드는 인간 — 의 영역이다. 건축가가 건물을 설계하고, 작가가 소설을 쓰고, 엔지니어가 회로를 설계한다. AI는 이것도 할 수 있다. 소설을 쓰고, 건물을 설계하고, 반도체 회로를 27초 만에 완성한다. 그러나 AI의 작업에는 한 가지가 빠져 있다. 아렌트는 작업의 핵심을 "세계에 영속적인 무언가를 추가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AI가 만든 것이 세계에 무언가를 추가하는가? 이 질문에 아직 인류는 합의하지 못했다.

행위는 아렌트의 세 범주 중 가장 독특하다. 행위는 물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렌트는 이것을 "나탈리티(natality)" — 탄생성 — 이라고 불렀다. 인간은 태어남으로써 세계에 전례 없는 무언가를 가져온다. 그리고 행위를 통해 그 전례 없음을 현실화한다. 정치적 연설, 사회 운동, 예상치 못한 용서,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의 전환. 행위의 본질은 예측 불가능성이다.

"행위의 의미는 그것이 끝난 후에야
드러난다. 행위하는 자 스스로도
결과를 알지 못한다."

Hannah Arendt · The Human Condition (1958)

2025년, Springer에 게재된 논문 한 편이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다. 결론은 분명했다. "행위를 AI에 위임하는 것은 인간 번영에 재앙적 결과를 초래한다." AI는 패턴을 학습하고 최적화된 결과를 내놓는다. 그러나 행위의 본질은 패턴을 깨뜨리는 것이다. 예측 가능한 행위는 행위가 아니라 노동이다.

소설 속에서

1편 "배당일"의 정해민은 새벽 3시에 아무도 제조하지 않을 회로를 그린다. "아리랑"이 27초 만에 더 나은 설계를 내놓는데도, 해민은 두 시간 동안 landscape_0301.gds라는 파일을 완성한다. 이것은 아렌트가 말한 '행위'다. 효율과 무관하게, 목적 없이, 예측 불가능한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 나노미터 단위의 풍경화를 그리는 해민의 손끝에서, 인간의 마지막 특권이 작동하고 있었다.

한나 아렌트
1906 — 1975
행위(Action)와 탄생성(Natality)

인간의 조건을 노동, 작업, 행위로 구분했다.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시작 — 행위 — 만이 진정한 인간적 활동이라고 주장했다.

존 메이너드 케인즈
1883 — 1946
주 15시간 노동의 예언

1930년에 기술 발전으로 손주 세대가 주 15시간만 일하게 될 것이라 예측했다. 기술은 맞았으나 사회는 그 방향을 선택하지 않았다.

데이비드 그레이버
1961 — 2020
불쉿 잡(Bullshit Jobs)

전체 일자리의 37~40%가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 케인즈의 예언이 실현되지 않은 이유를 권력 구조의 의도적 선택에서 찾았다.

Part III — The Vacuum

의미의 진공

WEF는 2025년 보고서에서 이례적인 표현을 썼다. "글로벌 직업 정체성 위기는 현실이며, 과소평가되고 있다(The global occupational identity crisis is real and underestimated)." 숫자 뒤에 숨겨진 심리적 재앙을 공식 문서에서 인정한 것이다.

노동이 사라지는 것은 소득이 사라지는 것과 다르다. 소버린 배당이나 기본소득으로 생활비는 해결된다. 그러나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체 내역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직업 상실의 심리적 단계는 연구를 통해 잘 문서화되어 있다. 놀라운 것은, 자발적 은퇴와 비자발적 해고가 비슷한 경로를 따른다는 점이다.

01

충격

"설마 나까지?" AI가 자신의 업무를 대체한다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 초기에는 부정한다. "내 일은 다르다"고 믿는다. 3~6개월.

02

정체성 침식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직함이 사라진 뒤 자기소개가 불가능해진다. 소셜 미디어 프로필을 수정하지 못한다. 6개월~2년.

03

배신감

"내가 바친 것은 무엇이었나?" 20년간 쌓은 전문성이 27초 만에 무의미해졌다는 분노. 분노 뒤에 오는 것은 공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파괴적인 것은 두 번째 단계다. 정체성 침식. 현대 산업사회에서 "나는 누구인가"는 거의 항상 "나는 무엇을 하는가"로 대체되어 있다. 의사, 엔지니어, 교사, 프로그래머. 직업이 곧 정체성이다. 이것은 한국처럼 "사시나요?"보다 "뭐 하시는 분이세요?"가 먼저 나오는 문화에서 더 심각하다.

LinkedIn은 이 현상을 "목적의 진공(purpose vacuum)"이라고 명명했다. 경제적으로는 안정적이지만 존재론적으로 표류하는 상태. 매달 배당이 들어와도 아침에 일어날 이유를 찾지 못하는 상태. 재정적 자유가 실존적 위기를 동반하는, 인류 역사에서 유례없는 역설.

소유감의 상실도 심각하다. "내가 이것을 만들었다"에서 "AI가 도와서 이것을 만들었다"로, 다시 "AI가 만들고 내가 확인했다"로. 단계적으로 주체성이 후퇴한다. 창작의 주도권이 넘어가는 순간, 결과물에 대한 자부심도 함께 사라진다.

소설 속에서

1편 "배당일"의 하은(16세)은 저녁 식사 중에 묻는다. "아빠, 엄마, 왜 예전 사람들은 매일 같은 곳에 갔어?" 해민과 수진은 대답을 찾지 못한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정확하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하은은 노동을 통한 정체성 형성을 경험한 적이 없는 최초의 세대다. 그녀에게 직업은 이해할 수 없는 과거의 유물이다. 그래서 그녀는 이 위기를 겪지 않는다. 대신, 전혀 다른 종류의 질문을 안게 될 것이다.

숫자는 냉정하다. Anthropic CEO 다리오 아모데이는 2025년 인터뷰에서 "화이트칼라 초급 일자리의 절반이 1~4년 내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WEF는 고용주의 41%가 2030년까지 인력을 줄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McKinsey는 2030년까지 글로벌 노동력의 최대 30%가 직업 전환을 경험할 것이라고 추산한다.

이것은 추상적인 미래가 아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그리고 경제적 보상으로 해결되지 않는 종류의 문제다. 배당을 두 배로 올려도, 아침에 일어날 이유는 생기지 않는다.

재정적 자유가
실존적 위기를 동반하는 시대.
인류 역사에 유례가 없다.

Part IV — The Last Bastion

그래서 인간은 무엇인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클라라와 태양(Klara and the Sun, 2021)"에서 인공 친구 클라라는 사랑을 학습한다. 관찰하고, 패턴을 분석하고, 자기 방식으로 헌신한다. 소설이 묻는 질문은 단순하다. AI가 사랑할 수 있다면, 인간만의 것은 무엇인가?

이언 M. 뱅크스의 "컬처(Culture)" 시리즈는 더 급진적인 설정을 제시한다. 노동이 완전히 불필요한 문명. 모든 물질적 필요가 충족된 사회. 그 세계에서 인간은 무엇을 선택하는가? 뱅크스의 대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놀이, 탐험, 위험, 관계. 그리고 가끔 — 아무 이유 없이 —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

테드 창은 2024년 The New Yorker 기고에서 이 문제를 가장 정확하게 짚었다.

"AI는 예술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술인지는
전혀 다른 질문이다."

Ted Chiang · The New Yorker (2024)

창의 논점은 이렇다. 예술의 가치는 결과물에 있지 않다. 과정에 있다. 인간이 고통, 기쁨, 좌절, 깨달음을 거쳐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그 과정 자체가 예술의 본질이다. AI는 결과물을 복제할 수 있다. 과정을 복제할 수는 없다. 과정이 없는 결과물은 — 아무리 기술적으로 완벽해도 — 예술이 아니라 생산이다.

법적 논의도 시작되었다. 미국 오하이오주와 콜로라도주는 AI 인격 부여를 선제적으로 금지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AI가 법적 주체가 되는 것을 원천 차단하려는 시도다. 이 법안의 이면에는 철학적 불안이 깔려 있다. AI가 인격을 가지면, 인간의 고유성은 무엇으로 정의할 것인가?

한국 SF 작가 천선란은 2024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AI 시대에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SF적 상상력이다." 과학이 현실을 설명하고, 공학이 현실을 바꾸는 동안, 문학은 현실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질문을 던진다. AI가 노동을 대체한 뒤 인간이 어떤 존재가 될 것인지를 탐구하는 것은, 경제학이나 공학이 아니라 철학과 문학의 영역이다.

다시 아렌트로 돌아가자.

아렌트의 세 범주 중 노동은 AI가 대체한다. 작업도 상당 부분 대체된다. 남는 것은 행위(Action)다.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시작. 타인 사이에서 말하고, 약속하고, 용서하고,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도약하는 능력. 아렌트는 이것을 인간 존재의 근본 조건이라고 보았다.

행위의 핵심은 예측 불가능성이다. AI는 학습 데이터의 패턴을 기반으로 다음 토큰을 예측한다. 예측 가능한 것만 생성할 수 있다. 물론 인간에게는 예측 불가능해 보이는 결과를 내놓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패턴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지, AI가 패턴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새로움 — 아렌트가 말한 탄생성 — 은 패턴의 외부에서 온다.

이것은 낙관론이 아니다. 냉정한 분석이다. AI가 대체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감정도 아니고 창의성도 아니다. AI는 감정을 시뮬레이션하고 창의적 결과물을 생성한다. AI가 대체할 수 없는 것은, 아무런 기반 없이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능력이다. 왜 시작하는지 설명할 수 없고, 결과가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고, 성공할 확률을 계산할 수 없는 그 도약. 그것이 행위다.

소설 속에서

정해민의 회로 파일 landscape_0301.gds. 3나노 공정의 설계 규칙을 따르지만, 어떤 제품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트랜지스터가 강을 이루고, 배선이 다리를 놓고, 논리 게이트가 도시를 세운다. 아리랑이 이 파일을 분석하면 "기능 없음, 효율 최적화 불가"라고 판정할 것이다. 그러나 이 파일을 만든 행위 자체가 — 새벽 3시에, 아무런 목적 없이, 손이 가는 대로 그린 그 시간 자체가 — 아렌트가 말한 행위다. 아무도 제조하지 않을 풍경화. 그러나 그것을 그리는 행위가 해민을 인간으로 만든다.

그래서 결론은 이것이다. AI 시대에 인간의 마지막 보루는 효율이 아니다. 창의성도 아니다. 감정도 아니다. 시작이다. 아무런 데이터 없이, 아무런 패턴 없이, 아무런 최적화 없이, 그냥 시작하는 것. 아렌트의 단어로 말하면, 탄생성. 세계에 전례 없는 무언가를 가져오는 능력.

이것은 AI에게 절대 위임해서는 안 되는 유일한 것이다. 노동은 위임해도 된다. 작업도 위임할 수 있다. 그러나 행위를 위임하는 순간, 인간은 인간이기를 멈춘다. 케인즈가 꿈꾸고, 그레이버가 고발하고, 아렌트가 명명한 그것 — 일하지 않는 인간이 여전히 인간일 수 있는 이유 — 은 오직 행위에 있다.

AI는 일을 대신한다
시작을 대신하지는 못한다

아렌트가 말한 '행위' —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시작. 그것이 인간의 마지막 보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