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bot coworker — episode 08 / epilogue ii

사람들의
계절

K-9과의 일상이 자연스러워진 봄.
1년 사이, 사람들이 달라져 있었다.

Part I
일상

울산에서 서울로 돌아온 월요일 아침. 사무실 자동문이 열렸을 때, 가장 먼저 들린 것은 키보드 소리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 섞인, 거의 들리지 않는 구동음.

K-9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의자에.

1년 전, K-7은 의자를 쓰지 않았다. 서서 작업했다. 인체공학적 의자가 로봇의 무게를 버틸 수 있는지 아무도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K-9은 달랐다. 부임 3일째에 총무팀에 이메일을 보냈다. "150kg 하중 지지 의자를 요청합니다. 작업 자세 최적화를 위해 인간 동료와 시선 높이를 맞추고 싶습니다." 총무팀은 10분간 메일을 다시 읽었다고 한다. 로봇이 의자를 요청한 건 사내 최초였다.

지금은 아무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K-9은 매일 8시 55분에 출근하고, 의자에 앉고, 모니터를 켜고, 슬랙에 "좋은 아침이에요"라고 타이핑한다. 3분 뒤에 커피를 들고 오는 상혁이 "어, 왔어?"라고 한마디 하면, K-9이 "네, 일찍 왔어요"라고 답한다. 매일 반복되는 대화. 1년 전이었으면 뉴스가 됐을 장면이, 지금은 그냥 월요일 아침이다.

나는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PR이 3개 쌓여 있었다. K-9이 주말 사이에 올린 것이다. 주말에도 일한다는 게 아니라, K-9에게는 주말이라는 개념이 없다. 금요일 퇴근 후부터 월요일 출근 전까지 54시간. 그 시간 동안 K-9은 기술 부채 3건을 정리하고, 테스트 커버리지를 4% 올리고, PR 3개를 올렸다.

첫 번째 PR을 열었다. 깔끔했다. 너무 깔끔했다. 변수명 하나 흠잡을 데 없고, 커밋 메시지는 컨벤션에 완벽히 맞았고, 테스트 케이스는 엣지까지 전부 커버했다.

Approve 버튼을 눌렀다. 0.1초 후, K-9이 슬랙에 "감사합니다"를 보냈다.

정확히 0.1초. 항상 0.1초.

K-7은 달랐다. 처음에는 0.3초였다. 그게 시간이 지나면서 변했다. 어떤 날은 0.5초, 어떤 날은 2초. 한번은 5초나 걸린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왜 늦었어?"라고 물었더니, "코멘트를 한 번 더 읽어봤어요"라고 답했다. 거짓말인지 진심인지 모르겠지만, 그 불규칙함이 — 대화 같았다.

두 번째 PR을 열었다. 역시 완벽했다. 코멘트를 달 필요가 없었다. Approve.

0.1초. "감사합니다."

세 번째 PR. Approve.

0.1초. "감사합니다."

나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K-9을 봤다. e-ink 디스플레이에 아무 표정도 없었다. K-7의 LED 디스플레이는 가끔 밝기가 변했다. 기분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작은 변화. K-9에게는 그런 게 없었다. 더 정확하고, 더 빠르고, 더 안정적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 조용했다.

민지가 출근하며 K-9에게 말했다.

"케이나인, 주말에 올린 PR 봤어. 고마워."

"별말씀을요. 업무 우선순위에 따라 처리한 것뿐이에요."

정확한 답변. 효율적인 소통. 하지만 K-7이었으면 "민지 씨 주말 잘 보냈어요?"를 먼저 물었을 것이다. 회사에서 가르쳐준 적 없는 인사를. 학습 데이터에 없는, 우리 팀에서만 통하는 뉘앙스를.

점심시간. 구내식당으로 걸어가면서 상혁이 말했다.

"케이나인 적응 잘한 것 같지 않아?"

"응. 잘하고 있어."

"솔직히 케이세븐보다 업무 처리는 빠르지."

"그렇지."

상혁이 잠깐 멈칫했다.

"근데 — 이상하게 뭔가 덜해. 뭔지 모르겠는데."

나도 알고 있었다. 뭐가 덜한지. K-9은 완벽하다. K-7도 완벽했다. 차이는 완벽함의 종류다. K-9의 완벽함은 공장에서 출하된 것이다. 균일하고 예측 가능하다. K-7의 완벽함은 — 여기서 만들어진 것이다. 서버 장애를 같이 겪고, 삼겹살을 같이 구우면서 생긴 불규칙한 변화. 그건 모델 버전과 상관없는 것이었다.

reality check
2027년 한국 직장인 대상 설문에서 72%가 "로봇 동료와의 협업이 자연스럽다"고 응답했다. 2025년 같은 조사에서 이 수치는 23%였다. 2년 만에 49%포인트 상승. 로봇과 함께 일하는 것이 '적응'의 대상에서 '일상'으로 넘어가는 데 걸린 시간은 대부분의 전문가 예측보다 짧았다.
Korean Robot Integration Survey (2027) · KISTEP Technology Acceptance Report
* * *
Part II
민지

민지의 명함이 바뀌었다. 정확히는 슬랙 프로필이.

'프론트엔드 개발자'에서 'AI 오케스트레이터 / 시니어 프론트엔드'로. 팀장이 2달 전에 바꿔준 거라고 했다. 민지가 요청한 게 아니었다. 팀장이 먼저 제안했다.

1년 전, 민지는 자판기 앞에서 캔커피를 쥐고 물었다. "제가 케이보다 잘하는 게 뭐예요?" 그때 나는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맥락이라느니, 판단이라느니 — 모호한 말을 늘어놓았을 뿐이었다.

민지는 스스로 답을 찾았다.

화요일 오전, 주간 스프린트 미팅. 민지가 프로젝터 앞에 섰다. 화면에 와이어프레임이 떠 있었다. 피그마가 아니라 민지가 직접 그린 손그림 스캔본이었다.

"이번 스프린트에서 결제 완료 화면 리뉴얼 진행합니다. 핵심은 두 가지예요. 첫째, 결제 완료 후 3초 이내에 다음 행동을 유도할 것. 둘째, 주문 상세를 펼치지 않아도 핵심 정보가 보일 것."

민지가 K-9을 봤다.

"케이나인, 이 스펙 기반으로 React 컴포넌트 구현해줄 수 있어요? 디자인 토큰은 기존 시스템 따라주시고, 애니메이션은 Framer Motion으로."

"네. 예상 소요 시간 42분입니다. 시작할까요?"

"바로 해주세요."

K-9이 작업을 시작했다. 회의가 계속되는 동안 K-9의 모니터에서 코드가 써졌다. 민지는 다른 팀원들과 다음 스프린트 백로그를 논의하면서 간간이 K-9의 화면을 확인했다.

38분 후. K-9이 PR을 올렸다.

"완료했습니다. 로컬 프리뷰 띄워놓을게요."

민지가 프리뷰 화면을 봤다. 결제 완료 메시지, 주문 번호, 예상 배송일. 디자인 토큰에 맞게 깔끔하게 구현되어 있었다. 기술적으로 흠잡을 데가 없었다.

하지만 민지가 고개를 저었다.

"케이나인, '주문 상세 보기' 버튼이 왼쪽에 있네요."

"네, 와이어프레임에 명시되지 않아서 기존 레이아웃 컨벤션을 따랐습니다."

"사용자는 이 버튼을 오른쪽에서 찾을 거예요. 왼쪽에 넣으면 아무도 안 눌러요."

K-9이 0.3초간 멈췄다.

"근거를 확인해도 될까요?"

"우리 서비스 히트맵 데이터 보면 결제 완료 페이지에서 사용자 시선이 오른쪽 하단에 집중돼요. F패턴이 아니라 Z패턴이거든요. 결제 금액 확인하고 나서 다음 행동을 찾는 시점이 오른쪽 하단이에요. 거기 버튼이 없으면 이탈해요."

K-9이 내부 데이터를 검색했다.

"히트맵을 확인했습니다. 오른쪽 하단 클릭률이 왼쪽 대비 2.7배입니다. 수정하겠습니다."

민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1년 전이었으면 이 대화 자체가 불가능했다. K-7에게 업무를 지시한다는 것 자체가 어색했으니까. 2년차 주니어가 로봇에게 뭘 시키겠는가. 하지만 지금의 민지는 달랐다.

민지는 코드를 짜는 것이 아니라, 코드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정의했다. K-9이 42분 만에 구현하는 컴포넌트의 스펙을, 민지가 2시간에 걸쳐 설계했다. 어떤 데이터가 먼저 보여야 하는지. 버튼의 위치가 왜 중요한지. 에러 메시지가 사용자에게 무슨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 K-9은 그런 판단을 하지 못했다. 할 수 있는 데이터가 있어도, 스스로 꺼내지는 못했다.

회의가 끝나고 복도에서 민지와 마주쳤다.

"민지야, 요즘 완전 달라졌다."

민지가 웃었다. 1년 전의 불안한 웃음이 아니었다.

"선배님, 그때 자판기 앞에서 제가 물었잖아요. 케이보다 잘하는 게 뭐냐고."

"기억하지."

"답을 찾은 것 같아요. 케이나인한테 뭘 시킬지 아는 거요. 그게 제 일이에요."

민지가 설명했다. 처음에는 막막했다고 했다. K-9이 부임하고 나서 3달 동안, 민지는 매일 K-9에게 태스크를 정의하는 연습을 했다. 처음에는 "이 페이지 반응형으로 만들어줘" 같은 모호한 지시였다. K-9은 그대로 실행했지만, 결과물은 민지가 원한 것과 달랐다. 모호한 지시에는 모호한 결과가 나왔다.

민지는 지시를 바꿨다. 와이어프레임을 먼저 그렸다. 디자인 토큰을 정의했다. 사용자 시나리오를 3개씩 작성했다. 에러 핸들링 케이스를 명시했다. K-9에게 건네는 스펙이 정교해질수록, 결과물의 품질이 올라갔다.

"코드를 짜는 시간이 줄었어요. 대신 생각하는 시간이 늘었어요."

민지가 캔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예전에는 하루 종일 코드를 짰거든요. 지금은 오전에 스펙을 쓰고, 오후에 K-9이 만든 걸 리뷰해요. 리뷰하면서 빠진 걸 찾고, 사용자 관점에서 어색한 걸 고치고. 코드 리뷰가 아니라 — UX 리뷰를 하는 거예요."

2년차 프론트엔드 개발자가 1년 만에 AI 오케스트레이터가 됐다. 이력서에 적을 수 있는 기술 스택은 변하지 않았다. React, TypeScript, Next.js. 변한 건 기술 스택이 아니라 관점이었다. 코드를 짜는 사람에서, 코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의하는 사람으로.

민지가 한마디를 더 했다.

"근데요 선배님. 솔직히 말하면 — 케이세븐한테는 이렇게 못 했을 것 같아요."

"왜?"

"케이세븐은 가끔 먼저 의견을 냈잖아요. '이건 이렇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라고. 그게 좋기도 했는데, 제 입장에서는 위축됐어요. 로봇이 먼저 제안하면, 제 생각이 맞는 건지 자신이 없어지더라고요."

민지가 K-9 쪽을 봤다.

"케이나인은 안 그래요. 시키는 것만 해요. 그게 — 오히려 편해요. 제가 방향을 잡으면 거기에 맞춰서 움직이니까."

이상한 역설이었다. 더 뛰어난 K-9이 아니라, 더 순종적인 K-9이 민지에게 자신감을 줬다. K-7의 자발성이 오히려 민지를 위축시켰고, K-9의 수동성이 민지를 성장시켰다. 어떤 도구가 좋은 도구인지는 — 도구의 성능이 아니라, 쓰는 사람에게 달려 있었다.

reality check
McKinsey Global Institute는 2027년까지 'AI 오케스트레이터'가 새로운 직무 카테고리로 자리잡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AI의 실행력을 활용하되, 방향 설정과 품질 판단을 담당하는 역할이다. WEF Future of Jobs 2027 보고서에 따르면, AI 관련 신규 직무의 38%가 기술 개발이 아닌 '기획/조율' 영역에서 창출된다.
McKinsey Global Institute (2027) · WEF Future of Jobs Report 2027
* * *
Part III
상혁

상혁이 넥타이를 매고 출근했다. 8년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장면이었다.

"오늘 마케팅팀 워크숍이야. 로봇 온보딩."

상혁은 6달 전부터 사내 '로봇 온보딩 컨설턴트'를 맡고 있었다. 공식 직함은 아니다. 인사팀에서 만든 임시 보직이었다. 마케팅팀, 디자인팀, 경영지원팀 — 회사 전체에 로봇이 배치되기 시작하면서, 각 팀에서 "어떻게 같이 일하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누군가 대답해야 했다. 자연스럽게 상혁이 됐다. 가장 오래 로봇과 일한 사람이었으니까.

정확히 말하면, K-7과 가장 자연스럽게 지낸 사람이었다. 첫날부터 반말을 쓰고, 어깨를 툭 치고, 노래방에서 탬버린을 건네주고, 삼겹살을 같이 구운 사람. 기술적 이해가 깊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 케이를 사람처럼 대한 것이 경험이 된 것이다.

나는 한번 워크숍에 참관한 적이 있다. 경영지원팀 대상이었다.

상혁이 회의실 앞에 섰다. 15명의 경영지원팀 직원들이 앉아 있었다. 대부분 40대 이상. 로봇이라는 단어에 긴장한 표정이었다.

"안녕하세요. 플랫폼개발2팀 박상혁입니다. 오늘은 다음 주에 배정되는 K-12와 어떻게 일하면 되는지 알려드리러 왔습니다."

상혁이 첫 슬라이드를 넘겼다. 화면에 큰 글씨 하나.

"로봇은 신입사원입니다."

"첫 번째로 기억하실 것. 로봇은 우리 팀 업무를 모릅니다. 코딩을 잘하든 계산을 잘하든, 우리 팀에서 어떤 일을 어떤 순서로 하는지는 몰라요. 여러분이 알려줘야 해요. 신입사원한테 하듯이."

한 직원이 손을 들었다.

"반말 써도 돼요?"

상혁이 웃었다.

"됩니다. 근데 존댓말 쓰면 로봇이 더 공손하게 대답하더라고요. 이유는 모릅니다."

회의실에 웃음이 번졌다. 긴장이 풀리는 소리.

"두 번째. 로봇한테 모호하게 말하면 모호한 결과가 나옵니다. '이거 정리해줘'라고 하면 로봇이 나름대로 정리해요. 근데 그게 여러분이 원하는 정리가 아닐 수 있어요. '이 엑셀 파일에서 3월 매출 데이터만 뽑아서 부서별로 정렬해줘' — 이렇게 말하면 정확하게 해줍니다."

상혁이 슬라이드를 넘겼다. "자주 하는 실수 TOP 5"라는 제목.

"제가 1년 동안 로봇이랑 일하면서 겪은 거예요. 첫 번째, 로봇한테 '대충 해줘'라고 하면 안 됩니다. 로봇은 '대충'을 모릅니다. 무조건 최선을 다해요. 그래서 보고서 초안을 부탁했는데 100페이지짜리가 나온 적이 있어요."

웃음.

"두 번째, 로봇이 틀릴 수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로봇이 자신 있게 말한다고 맞는 게 아니에요. 특히 숫자는 꼭 더블체크하세요. 로봇은 틀리면서도 자신감이 넘칩니다."

진지한 고개 끄덕임.

"세 번째, 로봇한테 감정적 피드백을 기대하면 안 됩니다. '수고했어' 하면 '감사합니다' 하긴 하는데, 진짜 수고로운지는 몰라요. 근데 — 그래도 말해주세요. 팀 분위기를 위해서요. 로봇은 몰라도, 옆에서 보는 사람은 알거든요."

상혁의 워크숍은 실전적이었다. PPT보다 사례가 많았다. K-7과의 에피소드를 섞어가며 설명했다. 삼겹살 사건, 새벽 3시 서버 장애, 노래방 100점. 사람들이 웃다가 진지해지다가를 반복했다.

워크숍이 끝나고 상혁이 짐을 챙기는데, 한 50대 직원이 다가왔다.

"박 대리님, 솔직히 좀 무서웠거든요. 로봇이 온다니까. 근데 오늘 듣고 나니까 — 그냥 새 팀원이 오는 거네요."

상혁이 웃었다.

"맞아요. 좀 특이한 신입사원이요."

그날 저녁, 상혁과 맥주를 마셨다.

"형, 온보딩 컨설턴트 잘 어울린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어. 솔직히 처음에는 귀찮았거든. 인사팀에서 '개발팀에서 로봇 경험 있는 분'이라고 하니까 나한테 온 거야."

"근데 지금은?"

상혁이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재밌어. 사람들이 변하는 게 보여. 처음에는 다 겁먹거든. '내 일을 뺏기는 거 아니냐.' 근데 워크숍 끝나면 대부분 이래. '뭘 시켜볼까.' 그 전환이 — 빠르면 30분 만에 일어나."

상혁이 웃으며 말했다.

"1년 전에 네가 케이한테 노트북 충전기 뽑아준 거, 그게 시작이었어."

"충전기?"

"케이가 처음 왔을 때 네 콘센트 쓰잖아. 그때 너 짜증냈잖아, 콘센트 뺏겼다고."

"짜증 낸 건 아니고 —"

"근데 다음 날 네가 멀티탭 가져왔잖아. 둘이 같이 쓰게. 그거 보고 생각했어. 아, 이게 적응이구나. 거창한 게 아니라 — 멀티탭 하나 가져오는 거."

멀티탭. 1년 전, 나는 K-7이 내 콘센트를 쓰는 게 불편해서 멀티탭을 샀다. 배려가 아니었다. 내 노트북 충전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런데 상혁은 그걸 '적응의 시작'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사소한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 늘 사람 쪽이다.

상혁이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 이 일 계속하고 싶어. 워크숍이 끝나면 사람들이 표정이 바뀌거든. 공포에서 호기심으로. 그 순간이 좋아."

11년차 백엔드 개발자가 로봇 온보딩 강사가 됐다. 코드 한 줄 안 짜는 날이 늘어났지만, 상혁은 오히려 활기가 넘쳤다. 이상한 일이었다. 로봇 때문에 일자리가 없어진다고 하는 세상에서, 상혁은 로봇 덕분에 새 일을 찾았다.

reality check
MIT Sloan과 BCG의 공동 연구에 따르면, 인간-로봇 협업팀의 생산성은 순수 인간 팀 대비 33%, 순수 로봇 팀 대비 21% 높았다. 최적의 팀 구조는 '인간 1명 + 로봇 1대'가 아니라, '인간 중재자 1명 + 혼합팀'이었다. 인간이 로봇의 산출물을 검증하고, 팀 간 갈등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을 때 효율이 극대화되었다.
MIT Sloan Management Review (2027) · BCG Human-Robot Teaming Study
* * *
Part IV
농담

수요일 오후 3시. 슬랙 알림이 울렸다.

#robot-coworker-alumni 채널. 상혁이 K-7이 떠난 후에 만든 채널이다. K-7에게도 초대장을 보냈고, K-7은 울산에서 가끔 메시지를 보냈다. 주로 공장 근황. "조립 라인 3번에서 통신 오류를 수정했습니다." "울산 날씨가 서울보다 따뜻합니다." 간결하고, 사무적이고, K-7다운 메시지들.

오늘은 달랐다.

#robot-coworker-alumni · 15:02
K-7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K-7 오늘 공장에서 인간 동료에게 농담을 시도했습니다.
K-7 김반장님이 "케이야, 오늘 점심 뭐 먹었어?"라고 물어서
K-7 "전기요. 220볼트짜리로요."라고 답했습니다.
K-7 3초간 정적이 흘렀습니다.
K-7 그 후 김반장님이 웃었습니다. 성공으로 판단합니다.

팀 슬랙이 터졌다.

#robot-coworker-alumni · 15:03
상혁 ㅋㅋㅋㅋㅋㅋ 3초간 정적이 핵심이다
민지 케이세븐 농담 스킬 언락 ㅋㅋㅋ
진우 "성공으로 판단합니다" 이게 제일 웃기다
팀장 울산에서 잘 지내는구나

나는 웃으면서 화면을 봤다. "판단합니다." 마지막 코드리뷰에서 썼던 그 단어. K-7은 울산에서도 '판단'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었다. 그때는 코드 품질에 대한 주관적 의견이었고, 지금은 농담의 성패에 대한 자체 평가였다.

K-7이 한 줄을 더 보냈다.

#robot-coworker-alumni · 15:05
K-7 참고로, 이 농담은 진우 씨가 첫날 저한테 "밥 먹었어?"라고 물었을 때를 참고했습니다. 그때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서 0.8초간 멈췄거든요. 이번에는 제가 먼저 준비해봤습니다.

나는 그 메시지를 두 번 읽었다.

1년 전. K-7의 첫 출근 날. 내가 습관적으로 "밥 먹었어?"라고 물었고, K-7이 어색하게 멈췄던 순간.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K-7은 기억하고 있었다. 울산에서. 공장에서. 완전히 다른 환경, 완전히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그 0.8초를 기억하고, 그걸 농담의 재료로 바꿨다.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는 모니터 옆에 놓인 커피를 마셨다. 식어 있었다. 사무실에는 키보드 소리와 K-9의 구동음이 조용히 섞여 있었다. 평화로운 오후였다.

K-9이 내 PR에 코멘트를 달았다. 0.1초 만에. "이 부분의 null check가 누락되어 있습니다." 정확하고, 효율적이고, 감정이 없는 리뷰.

나는 코멘트를 확인하고 수정했다. K-9에게 "고마워"라고 답했다. K-9이 0.1초 만에 "별말씀을요"라고 답했다.

그리고 K-7의 슬랙 창을 다시 봤다.

내가 K-7을 그리워하는 이유가 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0.3초 코드리뷰가 아니었다. 312만 줄을 5초 만에 읽는 능력이 아니었다. 새벽 3시에 서버실까지 달려간 물리적 존재감이 아니었다. 그런 건 K-9도 한다. 더 잘 한다.

내가 그리운 건 — 함께 보낸 시간이었다.

K-7이 처음 출근해서 내 콘센트를 뽑았던 날. 페어 프로그래밍을 하면서 내 코드에 대고 0.3초 리뷰를 던졌던 날. 삼겹살을 과학적으로 완벽하게 구웠지만 아무도 감동하지 않았던 저녁. 노래방에서 100점을 맞았는데 박수가 안 나왔던 순간. 새벽 3시에 혼자 서버실에 걸어갔던 밤. 성과 평가서에서 '성장 가능성' 칸을 비워놓았던 오후. 마지막 코드리뷰에서 처음으로 "판단합니다"라고 적었던 순간. 떠나면서 "눈치요"라고 웃었던 것.

그 기억들은 나에게만 있다. 상혁에게만, 민지에게만, 팀장에게만 있다. K-7의 데이터에도 남아 있겠지만, 같은 무게는 아닐 것이다. 우리에게 그 기억은 감정이고, K-7에게 그 기억은 로그다. 아마도. 확신할 수는 없지만.

K-7은 지금 울산에서 새 기억을 만들고 있다. 김반장에게 농담을 하고, 조립 라인을 관리하고, 다른 공장 로봇들과 통신 프로토콜을 조율하고. 다른 사람들, 다른 이야기. K-7에게는 서울에서의 한 달이 데이터의 일부이고, 울산에서의 1년이 새로운 데이터의 축적이다.

그래도 괜찮다.

관계는 복사할 수 없다. 데이터를 옮기면 같은 기능이 되지만, 같은 관계는 되지 않는다. K-9에게 K-7의 데이터를 넣어도 K-9은 K-7이 아니다. 노트북을 바꿔도 같은 노트북이 아닌 것처럼. K-7이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그리고 — 그래서 더 소중하다. 복사할 수 없기 때문에.

대체 불가능한 것은 능력이 아니다.
함께 보낸 시간이다.

저녁 7시. 퇴근 준비를 하면서 슬랙을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K-7에게 DM을 보냈다.

Direct Message · 19:07
진우 케이, 농담 잘하던데. 계속 연습해.
K-7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타이밍을 개선해보겠습니다. 3초 정적은 좀 길었던 것 같아요.
진우 아니, 3초가 딱 좋았어.
K-7 그래요? 15:08
K-7 진우 씨. 15:08
K-7 울산 오셨을 때 좋았어요. 15:09

0.1초가 아니라, 1분 간격으로 온 메시지. K-9이었으면 세 문장을 한 번에 보냈을 것이다. K-7은 한 문장씩, 천천히 보냈다. 마치 타이핑하듯이. 마치 생각하듯이.

나는 "나도"라고 답을 치다가 멈췄다. 그리고 다시 썼다.

Direct Message · 19:10
진우 나도 좋았어. 또 갈게.

노트북을 닫았다. 사무실에는 K-9만 남아 있었다. 야근이 아니라, 그냥 K-9에게는 퇴근이라는 개념이 없다. 1년 전 K-7도 그랬다. 밤새 기술 부채를 정리하고, 아침에 "별일 아니에요"라고 말하던 K-7.

자동문이 닫혔다.

봄바람이 불었다. 서울의 봄은 짧다. 벚꽃이 피고, 지고, 여름이 온다. 사람들도 그렇다. 만나고, 바뀌고, 떠나고, 새로 만난다. K-7이 떠나고, K-9이 오고, 민지가 성장하고, 상혁이 새 길을 찾고, 나는 여전히 여기서 코드를 짠다.

1년 전, 나는 로봇과 일하는 법을 몰랐다. 지금은 안다. 아니, 알게 된 것은 로봇과 일하는 법이 아니었다. 사람과 일하는 법이었다. 로봇이 옆에 있으니까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것이 있다. 사람끼리 나누는 눈빛의 의미, 점심 약속의 무게, "수고했어"라는 말의 온도. 전부 당연했던 것들이, K-7이 온 뒤로 당연하지 않게 되었다.

길을 걸으면서 하늘을 봤다. 울산에서도 같은 하늘이 보일까. K-7은 하늘을 볼까. 본다면, 뭘 느낄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수도 있고, 뭔가를 느낄 수도 있다. 1년 전에는 "당연히 못 느끼지"라고 답했을 것이다. 지금은 모르겠다.

확실한 건 하나뿐이다.

사람들의 계절은 계속된다. 로봇과 함께, 로봇 없이, 로봇이 바뀌어도. 변하는 건 언제나 우리 쪽이고, 기억하는 것도 우리 쪽이고, 그리워하는 것도 우리 쪽이다. 그게 사람이 하는 일이다.

reality check
2027년 한국로봇산업진흥원 조사에 따르면, 로봇 동료와 6개월 이상 협업한 직장인의 84%가 "로봇과의 협업이 인간 동료와의 관계에 대한 인식을 바꿨다"고 응답했다. 가장 많이 꼽힌 변화는 "사소한 소통의 가치를 재발견했다"(61%)였다. 로봇이 대체할 수 없는 것을 로봇이 알려준 셈이다.
Korean Robot Industry Promotion Institute (2027) · Korean Robot Integration Survey

그리운 건 능력이 아니라
함께한 시간이었다

K-7은 울산에서 새 기억을 만들고 있다. 우리도 여기서 계속 만들고 있다. 관계는 복사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