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verlap · Season 1 · Episode 03
잉크
냄새
을지로에서 30년 인쇄를 한 사람은
인쇄소가 문을 닫아도 잉크 냄새를 잊지 못한다.
이면은 그것을 알고 있다.
토요일 오후. 서연은 시험 사흘째에 접어들면서, 낮의 을지로를 다시 보게 되었다.
3년간 출퇴근길로 지나다닌 동네가 달라 보였다. 달라진 것이 아니라 — 보는 눈이 달라진 것이었다. 예전에는 인쇄소 사이의 카페가 세련된 변화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빈 셔터 옆에 붙은 '임대문의' 전단이 먼저 보였다.
서연은 걸으면서 세었다. 세기전자부터 시작해서 골목 끝 큰 도로까지. 영업 중인 가게 열아홉 곳. 문을 닫은 가게 열두 곳. 카페로 바뀐 곳 다섯. 5년 전 자료를 찾아보면 — 서연은 모른다. 하지만 시우가 말해줬다. 5년 전에는 인쇄소만 서른일곱 곳이었다고. 지금은 스물둘.
서연은 진흥인쇄 앞에서 멈췄다. 셔터가 올라가 있었고, 안에서 인쇄기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 뭔가 달랐다. 인쇄기 한 대만 돌아가고 있었다. 예전에는 두 대가 돌았었다. 서연이 기억하는 리듬은 두 대의 인쇄기가 약간 다른 박자로 만들어내는 복합음이었다. 지금은 단조로웠다.
문 앞에 사람이 서 있었다. 30대 초반의 여자. 정장 차림. 인쇄소와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다.
"혹시 고영수 사장님 따님이세요?"
여자가 돌아봤다. 눈이 피곤해 보였다.
"네. 혹시..."
"한서연이에요. 이 근처 출판사에서 일해요. 사장님이 — 며칠 전에 좀 편찮으셨다고 들어서."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고영수가 이면에서 3일을 보낸 것은 '편찮으셨다'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고영수의 딸 — 고은서 — 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는 괜찮으세요. 몸은요. 근데..."
은서가 인쇄소 안을 돌아봤다. 인쇄기 한 대가 돌아가고 있었다. 아버지가 아닌 젊은 직원이 조작하고 있었다.
"거래처가 다 끊겼어요. 마지막 단골이 지난달에 끝났고. 인쇄 단가를 맞출 수가 없대요. 디지털 인쇄소가 절반 가격이니까. 아버지는 30년 하셨는데."
"가게를..."
"매물 내놨어요. 다음 주에 부동산에서 보여주기로 했어요."
서연은 인쇄소 안을 바라보았다. 재단기, 접지기, 인쇄기. 30년간 쌓인 기름때와 잉크 자국. 벽에 걸린 달력 — 2월. 캘린더 아래에 적힌 메모들. 거래처 전화번호, 납품 일정, 적어놓은 숫자들. 곧 사라질 기록들.
"아버지가 요즘 이상해요."
서연의 귀가 쫑긋했다.
"밤마다 가게에 가고 싶어 하세요. 새벽에 깨서 가게 얘기만 하시고. 잠꼬대도 — 이상하게, 가게에서 일하는 꿈을 꾸시는 것 같아요. 주문서가 왔다, 팜플렛 500부 찍어야 한다, 이런 말을."
팜플렛 500부. 이면의 인쇄소에서 고영수가 했던 말. 그때 그 주문이 아직 고영수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사장님이 — 산책을 많이 하세요? 특히 밤에?"
"네, 그것도 이상해요. 원래 밤에 안 나가시는 분인데, 요즘은 자꾸 나가려고 하세요. 어제는 새벽 2시에 현관문 여는 소리에 깼어요."
서연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면의 끌어당김. 시우의 말이 떠올랐다 — 겹에 오래 있으면 이면에 동화된다. 고영수는 3일 동안 이면에 있었다. 구해냈지만, 이면의 기억은 아직 남아 있었다. 이면이 고영수를 부르고 있었다.
"사장님이 밤에 나가시면 — 꼭 따라가세요. 혼자 두시면 안 돼요."
은서가 이상한 눈으로 서연을 봤다. 서연은 더 설명할 수 없었다. 당신 아버지는 차원이 겹치는 곳에 3일간 갇혀 있었고, 그 세계가 아직 아버지를 부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 감사합니다. 신경 써주셔서."
서연은 인쇄소를 뒤로하고 걸었다. 잉크 냄새가 골목에 배어 있었다. 30년의 인쇄가 남긴 냄새. 가게가 팔리면, 그 냄새도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이면에 — 잉크 냄새가 나는 인쇄소가 하나 더 생기겠지.
그날 밤 10시. 시우가 서연을 데리고 간 곳은 골목이 아니었다.
을지로 3가 골목 한 귀퉁이, 인쇄 자재상 위 2층. 좁은 계단을 올라가면 낡은 사무실 같은 공간이 있었다. 한때 인쇄소 사무실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 야경의 거점이었다.
방 안에 두 사람이 더 있었다.
벽에 기대서 팔짱을 끼고 있는 남자. 짧은 머리, 넓은 어깨, 무표정. 서연이 들어왔을 때 눈만 움직여 쳐다봤다. 첫인상은 — 무거웠다. 바닥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존재감이 묵직했다. 토(土)라는 속성이 어울렸다.
창가에 앉아 있는 여자. 단발머리, 마스크를 턱 아래로 내린 채. 서연을 보자 손을 흔들었다. 하진과 대조적으로 가벼웠다. 하지만 가볍다는 것이 얕다는 뜻은 아니었다. 응급실 간호사. 사람의 생사를 매일 보는 직업.
"오, 진짜 왔다. 시우가 엄청 좋아하던데."
"유나 씨, 그건 —"
"아, 미안미안. 어쨌든 반가워요. 한서연 씨 맞죠?"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서연의 양손을 잡았다. 손이 시원했다. 수(水). 서연은 시우의 바람, 도영의 열기에 이어 세 번째 야경의 감각을 느꼈다.
"어디 다친 데 없죠? 이면에 다녀왔다고 들었는데 — 두통이나 이명은요?"
"없어요."
"좋아요.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제가 체크할게요."
하진이 벽에서 등을 떼며 입을 열었다. 처음으로.
"겹을 본다며. 어느 정도?"
직접적이었다. 서연은 잠깐 생각했다.
"이면의 간판 글자를 읽을 수 있어요. 이면의 가게 내부를 — 현실에서도 겹쳐서 볼 수 있어요."
하진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것이 이 남자가 보여준 가장 큰 감정 반응이었다.
"나는 2년 해도 이면의 형체를 못 본다. 땅의 진동으로 구조 변화만 감지할 수 있어."
"하진 오빠는 다른 게 강하잖아. 이면의 구조가 바뀌면 제일 먼저 아는 사람이 하진 오빠야."
유나가 중재했다. 하진은 다시 벽에 기댔다. 적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냥 — 검증이었다. 2년간 야경을 해온 사람이 새로운 동료를 평가하는 방식. 서연은 이해했다.
도영은 오지 않았다. 시우가 설명했다 — 대장은 여기에 자주 오지 않는다. 일곱 번째 겹점을 포함해 여러 곳을 돌아다닌다. 네 사람의 일상 순찰은 각자 맡은 겹점에서 이루어진다. 시우가 을지로, 하진이 종로, 유나가 마포. 나머지는 도영이 커버한다.
"오늘은 특별해요. 네 명이 다 모이는 건 드문 일이거든요. 신입 환영회 겸 — 이면의 규칙을 알려드릴게요."
시우의 말에, 하진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하진이 설명을 시작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정확했다. 사진작가라기보다 교관의 어조였다.
서연은 다섯 가지를 머릿속에 새겼다. 에디터의 습관으로 — 핵심 키워드를 추출했다. 시간, 문자, 섭취, 인지, 대칭. 다섯 축. 이면의 세계를 지탱하는 다섯 가지 규칙.
"두 번째 법칙. 이면이 의도적으로 정확한 글자를 보여주는 경우 — 그건 뭔가요?"
하진이 잠깐 멈칫했다. 유나가 대신 대답했다.
"함정이에요. 이면이 사람을 붙잡기 위해 쓰는 방법이에요. 처음에는 한 글자씩 다르다가, 사람이 오래 머물면 — 이면이 그 사람에게 맞춰 변해요. 글자가 정확해지고, 소리가 돌아오고,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러면 그 사람은 여기가 현실이라고 믿기 시작해요."
"고 사장님이 그랬던 거예요?"
"네. 3일이면 초기 단계. 이면의 인쇄소가 고 사장님에게 맞춰서 변했어요. 주문서가 있고, 인쇄기가 돌아가고. 사장님이 원하는 세계."
현실이 빼앗은 것을, 이면이 돌려준다. 거래처를 잃은 인쇄소 사장에게 — 주문이 있는 인쇄소를. 그 대가가 뭘까.
시우가 덧붙였다.
"대가는 기억이에요. 이면에 오래 있을수록 현실의 기억을 잃어요. 처음에는 사소한 것 — 어제 뭘 먹었는지, 누구와 통화했는지. 그다음에는 더 큰 것 — 가족의 이름, 자기 나이, 자기가 누구인지."
서연은 고영수를 떠올렸다. 이면에서 3일. 구출했을 때, 그는 가족을 기억하고 있었을까? 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을까? 서연은 확인하지 못했다.
자정. 네 사람이 을지로 골목을 순찰했다.
시우가 선두. 바람으로 겹의 상태를 읽으며 걸었다. 하진이 후미. 땅의 진동을 감지하며 구조 이상을 확인했다. 유나가 서연 옆에서 설명을 이어갔다.
"보통 밤은 순찰만 해요. 겹이 열리면 방황자 처리하고, 혹시 사람이 빨려 들어갔는지 확인하고. 큰 일이 없는 밤이 좋은 밤이에요."
오늘은 좋은 밤이 아니었다.
유나가 먼저 감지했다. 걸음을 멈추고 오른손을 들었다. 손끝에 수분이 응결되고 있었다 — 공기 중의 습기가 유나의 손에 모이는 것이 보였다.
"생체 반응. 겹점 입구 근처. 사람이 한 명 있어요."
네 사람이 골목 입구로 이동했다. 가로등 아래에 사람이 서 있었다.
고영수였다.
파자마 차림. 슬리퍼. 2월의 밤에 외투도 없이. 눈이 반쯤 감겨 있었다. 서 있는데 걷고 있는 것 같은 — 묽어진 의식의 표면에서 몸만 움직이는 상태. 몽유병.
고영수가 골목을 향해 한 발짝 내디뎠다.
"멈춰요!"
시우가 바람을 보냈다. 고영수 앞에 투명한 장벽이 생겼다. 고영수의 몸이 부드럽게 막혔다. 하지만 고영수는 멈추지 않았다. 벽에 부딪힌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듯, 계속 앞으로 걸으려 했다. 슬리퍼가 아스팔트 위에서 끌리는 소리가 났다.
하진이 무릎을 꿇고 손바닥을 바닥에 댔다. 아스팔트 아래에서 미세한 진동이 올라왔다.
"겹이 이 사람을 잡아당기고 있어. 지면 아래로 인력이 느껴져."
유나가 고영수에게 다가가 맥을 확인했다.
"맥박 정상. 체온 정상. 근데 — 의식이 여기에 없어요. 몸은 여기인데 의식이 이면에 가 있는 것 같아요."
서연이 앞으로 나갔다.
"사장님."
반응이 없었다. 고영수의 눈이 반쯤 열려 있었지만, 초점이 없었다. 서연이 아닌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아마 이면의 골목을. 이면의 인쇄소를. 주문이 있고, 인쇄기가 돌아가고, 할 일이 있는 그곳을.
서연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뉴스 앱을 열었다. 오늘의 기사. 현실의 글. 정확한 글자.
서연은 기사를 소리 내어 읽었다. 분명한 발음으로. 또박또박. 에디터가 교정 원고를 읽듯이. 현실의 글자. 현실의 소리. 현실의 날씨와 주가와 야구 시범경기.
"프로야구 시범경기 일정이 확정되었습니다. 한화 이글스는 —"
고영수의 눈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서울 낮 최고기온 7도. 미세먼지 보통."
고영수의 입술이 떨렸다.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서연이 귀를 가까이 댔다.
"... 한화가 올해는 되나..."
서연이 웃음을 참았다. 현실의 반응이었다. 이면의 인쇄소 사장이 아닌, 현실의 야구팬 고영수의 반응.
"사장님. 여기예요. 을지로 3가예요."
고영수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의 차림을 내려다보았다. 파자마. 슬리퍼. 2월의 밤.
"... 내가 왜 여기 있지?"
"몽유병이에요. 걸어서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고영수가 얼굴을 찡그렸다. 추위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유나가 재빨리 자기 패딩을 벗어 고영수의 어깨에 걸쳤다.
"택시 불러드릴게요. 댁이 어디세요?"
고영수가 주소를 말했다. 유나가 택시를 호출했다. 기다리는 동안, 고영수가 골목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골목. 셔터가 내려진 인쇄소들.
"... 꿈을 꿨어."
서연이 들었다.
"인쇄소 꿈. 주문이 밀려 있고, 인쇄기가 두 대 다 돌아가고. 이 사장이 전화해서 급하다고 하고. 바빴어. 좋았어."
고영수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꿈에서 깨는 게 — 안 깨는 것보다 힘들더라."
택시가 왔다. 고영수가 탔다. 서연이 은서에게 전화를 걸어 아버지가 가고 있다고 알렸다. 택시가 떠난 뒤, 네 사람이 편의점 불빛 아래 서 있었다.
시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세 번째예요. 고 사장님. 이면에서 구출한 게 한 번, 방황자처럼 끌려온 게 이번으로 두 번째. 점점 간격이 짧아지고 있어요."
하진이 말했다.
"이면이 사장님을 놓지 않는 거야. 3일 동안 동화가 진행됐으니까. 완전히 현실로 돌아온 게 아니야."
유나가 고개를 저었다.
"몸은 현실이에요. 바이탈 정상이에요. 문제는 마음이에요. 마음이 이면에 남아 있는 거예요."
서연은 세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고영수의 딸 은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거래처가 다 끊겼어요. 매물 내놨어요. 30년 하셨는데.
"이면이 고 사장님을 부르는 게 아니라 — 사장님이 이면으로 가고 싶은 거 아닐까요."
세 사람이 서연을 봤다.
"현실에서는 인쇄소가 문을 닫아요. 거래처가 없어요. 할 일이 없어요. 이면에서는 — 주문이 있고, 인쇄기가 돌아가고, 할 일이 있어요. 이면이 잡아당기는 게 아니라, 사장님이 갈 곳을 이면밖에 모르는 거 아닐까요."
침묵이 흘렀다. 시우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진이 바닥을 봤다. 유나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서연이 을지로 골목을 바라보았다. 셔터가 내려진 가게들. 임대문의. 카페 공사 중. 변해가는 동네.
을지로가 사라지고 있다. 인쇄소가 사라지고, 철물점이 사라지고, 공구 가게가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사라지는 곳마다 — 이면이 두꺼워진다. 사라진 것들을 품고, 사라진 사람들을 부르면서.
유나가 서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오늘 잘했어요. 뉴스 읽어주는 거 — 좋은 방법이었어요. 현실의 소리가 이면의 잡아당김을 끊거든요."
"다음에도 되나요?"
"다음에는 — 안 통할 수도 있어요. 이면의 끌림은 점점 강해지거든요."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이 있을 것이다. 고영수는 다시 올 것이다. 이 골목으로. 이면으로. 현실이 그에게서 빼앗은 것을, 이면이 돌려주겠다고 속삭이는 한.
네 사람이 흩어졌다. 하진은 종로 방향으로, 유나는 마포 방향으로. 시우와 서연만 남았다.
"서연 씨."
"네."
"아까 한 말 — 이면이 잡아당기는 게 아니라 사장님이 가고 싶은 거라는 거. 맞는 것 같아요. 근데 그게 — 더 무서운 거예요."
"왜요?"
"이면에 끌려가는 건 막을 수 있어요. 바람으로 장벽을 만들고, 하진이 땅을 고정하고. 물리적으로 막을 수 있어요. 근데 —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은 못 막아요."
서연은 고영수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면의 인쇄소에서 평화롭게 종이를 확인하던 얼굴. 택시를 타면서 골목을 돌아보던 얼굴. 꿈에서 깨는 게 안 깨는 것보다 힘들다고 했던 목소리.
을지로의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잉크 냄새가 아직 골목에 남아 있었다. 내일이면 조금 더 옅어질 냄새. 모레면 더. 한 달 뒤에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냄새. 하지만 이면은 기억할 것이다. 이면은 사라지는 것을 전부 기억한다.
현실이 빼앗은 것을
이면은 돌려준다
그 대가는 기억이다.
꿈에서 깨는 것이, 깨지 않는 것보다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