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khyang — fiction 01

탈마(脫魔)

천마신교 흑살대 수석살수. 40년간 어둠 속에서 칼만 갈았다.
장로원의 숙청이 시작된 밤, 죽음의 문턱에서 경계를 지웠다.
눈을 떴을 때, 달이 두 개였다. 그리고 몸도.

第一章

"쾌(快)"

묵향(默香) 55 · 흑살대 수석살수 · 천마신교 · 극마(克魔)

칼을 뽑아 목을 긋기까지, 한 호흡의 삼분지 일.

소리가 없었다. 피가 분출하기 전에 묵향은 이미 칼을 닦고 있었다. 서역과 중원의 경계에 있는 작은 객잔. 자정이 넘은 시각. 이층 방에서 잠들어 있던 남자는 이제 깨어나지 못한다. 무림맹 연락책. 정파와 마교 사이에서 정보를 넘기던 쥐.

흑살대에 제거 명령이 떨어진 지 이틀. 묵향에게는 이틀도 필요 없었다.

살수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다. 쾌(快). 빠르게 접근하고, 빠르게 끊고, 빠르게 사라진다. 스승이 처음으로 가르쳐 준 것이 이것이었다. 칼을 드는 기술이 아니라, 칼을 드는 속도. 아무리 날카로운 칼도 느리면 막힌다. 아무리 무딘 칼도 빠르면 뚫린다. 살수의 본질은 속도다.

객잔 지붕 위에서 칼을 확인했다. 살수도(殺手刀). 자루를 포함해 한 자 반. 40년간 같은 길이의 칼을 써왔다. 짧아서 숨기기 좋고, 가벼워서 뽑기 빠르고, 한 번이면 끝나는 길이. 검이 아니라 도(刀). 베는 것이 아니라 긋는 것. 찌르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것. 살수의 칼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이름 묵향(默香) 암호명 무향(無香) — 흔적 없이 죽이는 자 소속 천마신교(天魔神敎) 흑살대(黑殺隊) 경지 극마(克魔) 후기 — 정파 명칭: 화경(化境) 무공 역혈심법(逆血心法), 무상검법(無相劍法·자창) 수련 40년

흑살대. 천마신교의 그림자. 교주 직속. 3천 명의 마교 무인 중 엄선된 50명. 존재 자체가 비밀이다. 흑살대의 살수는 이름 대신 암호를 가진다. 교주만이 진명을 안다. 묵향의 암호는 무향(無香). 소리 없는 향. 향이란 퍼지는 것이다. 하지만 묵향의 향은 퍼지지 않는다. 좋은 살수의 이름이다.

15세에 들어왔다. 고아였다. 이름도 없었다. 훈련교관이 이름을 지어 주었고, 역혈심법(逆血心法)을 가르쳐 주었다. 마교의 기본 심법. 혈맥을 역행시켜 기를 순환하는 법. 은신과 경공에 최적화된 내공이다. 40년을 수련하면 절정에 이른다. 묵향은 20년 만에 절정을 넘었다.

남는 20년 동안 할 수 있는 것이 수련밖에 없었다. 친구는 없다. 가족은 없다. 취미가 없다. 임무와 임무 사이의 빈 시간에 칼을 잡고, 칼을 놓고, 다시 잡았다. 어느 날 칼의 끝에서 형태가 보이기 시작했다. 검기(劍氣). 기를 칼에 실어 날리는 것. 흑살대에서는 가르치지 않는 기술이었다. 살수에게 검기는 필요 없다. 살수에게 필요한 것은 은신과 급소 하나를 정확히 긋는 것뿐이니까.

하지만 묵향은 멈추지 않았다. 멈출 이유가 없었다. 검기를 넘어 검강(劍罡)에 이르렀다. 기를 검의 형태로 응축하는 경지. 극마(克魔). 마교에서 화경을 부르는 이름이다. 마(魔)를 이긴다는 뜻이다. 정파에서는 검강을 자유자재로 쓰는 경지라 가르치지만, 묵향에게 극마란 다른 것이었다. 칼이 의식을 벗어나는 순간. 생각하기 전에 몸이 움직이고, 몸이 움직이기 전에 기가 흐르는 경지. 그 경지에서 묵향은 자신만의 검법을 만들었다.

무상검법(無相劍法). 형태가 없는 검. 초식을 만들지 않았다. 초식은 패턴이고, 패턴은 읽힌다. 살수의 검은 읽히면 안 된다. 무상검법은 상대의 기를 읽어 가장 빠른 한 수를 찾는 검법이다. 상(相)이 없으니 막을 수 없고, 형태가 없으니 예측할 수 없다. 완벽한 살수의 검이었다.

하지만 완벽한 살수에게 이 검법은 필요 없었다. 살수의 상대는 잠든 적이다. 기습에 검법이 무슨 소용인가. 묵향이 이 검법을 쓴 적은 평생 세 번뿐이었다.

40년이다. 처음 칼을 잡았을 때의 떨림은 기억나지 않는다. 두 번째 임무에서 사람을 죽이고 구역질을 했던 것은 어렴풋이 기억난다. 세 번째부터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다. 훈련교관이 말했다. 느끼지 않는 것이 재능이라고. 칼이 의지를 갖지 않듯 살수도 의지를 갖지 않는다고. 그것이 흑살대의 도(道)라고.

객잔 지붕에서 바람을 맞았다. 별이 있었지만 보지 않았다. 별에 관심이 없었다. 칼을 넣고, 지붕에서 내려와,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천마신교로 돌아가 임무 완료를 보고해야 한다.

이것이 흑살대의 마지막 임무가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第二章

"산공(散功)"

천마신교로 돌아온 것은 나흘 뒤였다.

중원 남쪽, 만리장하를 건너 마교의 영역으로 들어서면 첩첩산중 깊은 곳에 천마신교가 있다. 천 길 절벽 아래, 해가 닿지 않는 협곡. 마교가 3백 년간 거점으로 삼아 온 곳이다. 2만 명의 무인이 이 어둠 속에서 숨 쉬고 있다.

입구에서 이상함을 느꼈다. 초소의 경비가 바뀌어 있었다. 호법원 소속이 아니라, 장로원 직속 무인들이 서 있었다. 묵향을 보는 눈빛이 경계가 아니라 감시였다.

무슨 일이 있었다.

흑살대 본거지는 천마신교 최하층에 있다. 지상에서 계단 3백 개를 내려가야 닿는 곳. 빛이 들지 않는 곳. 살수는 어둠 속에서 산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두 가지를 확인했다. 하나, 흑살대 소속 인원이 보이지 않는다. 둘, 장로원 무인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흑살대 문 앞에 사람이 서 있었다.

공허진(空虛眞) 62 · 장로원 수석장로 · 천마신교 · 극마(克魔) 극기

장로원 수석장로. 천마신교에서 교주 다음가는 권력자. 극마(克魔) 극기. 묵향보다 한 단계 위. 하지만 묵향은 이 남자의 얼굴을 열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흑살대와 장로원은 접점이 없다. 흑살대는 교주에게만 명령을 받는다. 장로원이 흑살대 앞에 서 있다는 것 자체가 비정상이다.

"무향. 오래간만이다."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묵향은 그 부드러움 아래 있는 것을 읽었다. 살수는 사람의 의도를 읽는 훈련을 받는다. 표정, 호흡, 기의 미세한 파동. 공허진의 기에서 묵향이 읽은 것은 — 확인. 이 남자는 묵향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목록에서 이름에 줄을 긋듯이.

"교주님의 명을 받아 전한다. 흑살대는 오늘부로 해체된다."

묵향의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른손의 검지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칼자루 위에서.

"교주님의 명이라 했는가."

"그렇다."

거짓이었다. 교주의 기를 40년간 곁에서 느꼈다. 교주의 명령에는 교주의 기가 실린다. 공허진이 전달하는 '명'에서 교주의 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교주님이 유폐되었거나, 죽었다. 장로원이 움직였다.

장로원은 오래전부터 교주의 권한을 탐내고 있었다. 천마신교의 구조는 단순하다. 교주가 절대 권력을 쥐고, 장로원은 교주를 보좌한다. 하지만 교주의 실권은 세 조직에 있다. 호법원, 원로원, 그리고 흑살대. 이 중 흑살대는 장로원의 눈과 귀를 벗어난 유일한 조직이었다. 교주만이 흑살대에 명령을 내리고, 교주만이 흑살대의 보고를 받았다. 마교의 자금 흐름, 정파와의 밀약, 무림맹 안에 심어 둔 간첩 목록 — 장로원이 결코 알아서는 안 되는 것들을 아는 유일한 조직.

장로원이 교주를 밀어내려면, 흑살대를 먼저 제거해야 했다.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계단 위. 여덟 명의 기. 절정에서 초절정 사이. 장로원 직속 호위대. 아래에서도 기척. 흑살대 본거지 안쪽에 열 명 이상. 이미 흑살대 인원은 처리된 것이다. 50명의 살수가 전원.

포위.

"네가 마지막이다, 무향. 순순히 무공을 봉인당하면 목숨은 살려 주마."

부드러운 목소리. 하지만 그 뒤에 숨은 진의를 읽었다. 살수의 최고 살수를 살려 둘 이유가 없다. 묵향이 아는 것이 너무 많다. 무공을 봉인한 뒤 입을 막겠다는 뜻이다.

산공(散功).

마교 무인의 숙명이 떠올랐다. 마공(魔功)을 수련한 자는 늙으면 산공을 맞는다. 평생 쌓은 내공이 한꺼번에 흩어지며 온몸의 경맥이 파열한다.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마교의 관례상, 산공이 시작되면 가장 가까운 동료가 일격으로 끝내 준다. 고통 없이 보내주는 것이 마교식 자비다. 하지만 지금 흑살대는 전멸했다. 묵향에게 일격을 날려줄 동료는 없다. 무공을 봉인당한 채 산공을 기다린다면 — 어둠 속에서 혼자, 뼈가 부서지는 고통을 감당하며 죽는다.

극마 이상의 경지에 도달해도 산공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산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단 하나. 탈마(脫魔). 마에서 벗어나는 것. 마교 역사상 탈마에 도달한 자는 손에 꼽는다. 묵향의 극마 후기로는 갈 수 없는 경지다.

묵향은 주위를 살폈다. 살수의 눈으로. 출구 없음. 위에 여덟, 아래에 열. 공허진은 극마 극기. 합계 열아홉 명. 묵향은 극마 후기이지만, 공허진의 극마 극기와는 반 단계 차이가 있다. 반 단계. 보통의 무인에게는 좁혀지지 않는 벽.

하지만 묵향은 살수다. 살수는 정면으로 싸우지 않는다.

칼을 뽑았다. 한 자 반. 40년.

그리고 — 아래로 뛰었다.

흑살대 본거지 최하층. 더 아래가 없는 곳. 선대 교주들이 봉인해 둔 금지 구역. 무엇이 있는지 장로원도 모른다. 하지만 묵향은 알고 있었다. 40년간 이 어둠 속에서 살았으니까. 벽의 균열, 바닥의 틈새, 봉인의 약한 곳. 살수는 모든 공간의 약점을 파악한다. 탈출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수의 본능으로.

뒤에서 고함이 터졌다. 공허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날카로운 호령으로 바뀌었다.

"잡아라!"

열아홉 명의 기가 한꺼번에 움직였다. 묵향은 어둠 속을 달렸다. 이 어둠은 묵향의 영역이다. 40년간 살아온 곳. 눈을 감아도 모든 돌의 위치를 안다. 추격자들은 그렇지 않다. 하나둘 벽에 부딪히고, 함정에 걸리고, 갈림길에서 멈칫했다. 살수의 본거지에는 살수가 만든 길이 있다. 빛이 없는 길. 기척이 없는 길.

하지만 공허진은 달랐다. 극마 극기의 감각은 어둠 속에서도 묵향의 기를 놓치지 않았다. 추격자들을 제치고 단독으로 쫓아왔다. 거리가 줄어들었다.

막다른 곳에 다다랐다.

석벽이었다. 오래된 벽. 표면에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한자가 아니었다. 천마신교보다 오래된 것. 선대 교주들조차 해독하지 못하고 봉인만 해 둔 곳. 묵향은 40년간 이 벽 앞을 수없이 지나쳤다.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무엇이 새겨져 있는지도 읽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벽에서 무언가가 느껴졌다. 기와 같지만 기가 아닌 것. 묵향이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에너지. 벽 너머에서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공허진이 도착했다. 단 둘이었다. 나머지는 뒤처졌다.

"막다른 곳이다, 무향."

第三章

"경계를 지우다"

공허진이 먼저 움직였다.

극마 극기의 검강이 손바닥에서 피어올랐다. 가시적인 빛. 어둠 속에서 푸르게 빛나는 기의 날. 극마의 검강은 화경의 검기와 차원이 다르다. 검기가 기를 칼에 실어 날리는 것이라면, 검강은 기 자체를 칼로 만드는 것이다. 응축된 검강은 강철보다 날카롭고, 금속보다 단단하다.

묵향은 막지 않았다. 피했다. 살수는 막지 않는다. 쾌(快). 빠르게 피하고, 빠르게 반격한다. 벽을 타고 올라갔다. 공허진의 검강이 벽을 갈랐다. 돌가루가 흩날렸다. 고대 문자가 새겨진 벽 옆으로 깊은 상흔이 생겼다.

좁은 공간이었다. 살수에게 좁은 공간은 유리하다. 큰 움직임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묵향의 무상검법은 좁은 곳에서 더 빛난다. 형태가 없으므로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살수도로 공허진의 검강 밑을 파고들었다. 쾌. 빠르게. 급소를 노렸다. 목. 겨드랑이 아래. 서혜부.

하지만 반 단계의 벽이 있었다. 극마 후기와 극마 극기. 묵향의 칼이 급소에 닿기 직전, 공허진의 기가 미세하게 먼저 움직여 궤도를 틀었다. 극마 극기의 반응 속도는 극마 후기를 능가한다. 칼끝이 빈 곳을 스쳤다.

공허진이 웃었다.

"빠르군. 역시 흑살대 수석살수다. 하지만 — "

검강이 세 갈래로 갈라졌다. 왼쪽, 오른쪽, 정면. 세 방향에서 동시에 들어오는 기의 날. 극마 극기가 아니면 구사할 수 없는 기술. 한 줄기의 검강을 셋으로 나누려면, 기의 총량이 아닌 기의 정밀도가 극한에 달해야 한다.

피할 수 없었다.

첫 번째가 오른쪽 옆구리를 갈랐다. 뼈에 닿는 깊이. 두 번째가 왼쪽 어깨를 관통했다. 칼을 잡은 팔이 흔들렸다. 세 번째를 — 무상검법의 마지막 수로 쳐냈다. 상대의 기를 읽어 가장 빠른 한 수. 하지만 극마 후기의 칼로 극마 극기의 검강을 완벽히 막을 수는 없었다. 살수도가 튕겨 나갔다. 40년의 동반자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세 번째 검강의 잔여가 가슴을 비스듬히 그었다.

묵향이 벽에 등을 기댔다. 그 벽. 고대 문자가 새겨진 벽. 피가 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끝이다."

공허진이 천천히 다가왔다. 검강을 유지한 채.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묵향은 죽어가고 있었다. 옆구리, 어깨, 가슴. 세 곳에서 피가 흘렀다. 의식이 흐려졌다. 어둠이 더 깊어졌다. 40년간 살아온 어둠보다 더 깊은 어둠이 밀려왔다.

40년이었다. 15세에 처음 칼을 잡았다. 이름 없는 고아에게 이름을 주고, 칼을 주고, 어둠을 주었다. 명령을 받고, 칼을 들고, 사람의 생을 끊었다. 누구를 위해. 교주를 위해. 천마신교를 위해.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왜 칼을 드는가. 누구를 위해 드는가. 칼이 의지를 갖지 않듯 살수도 의지를 갖지 않는다. 그것이 흑살대의 도라고 배웠다.

하지만 지금, 등이 차가운 석벽에 닿은 채 피를 흘리며, 질문이 떠올랐다. 40년간 한 번도 묻지 않았던 질문.

내가 원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등 뒤의 벽이 진동했다.

묵향의 피가 벽에 닿은 순간부터였다. 고대 문자가 빛나기 시작했다. 40년간 수련으로 기가 스며든 피. 극마의 내공이 녹아 있는 피. 벽 너머의 에너지가 그 기에 반응했다.

공허진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벽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의 밀도가 심상치 않았다.

"이것은 — "

묵향은 죽어가는 의식 속에서 벽의 진동을 느꼈다. 기와 같지만 기가 아닌 에너지. 역혈심법의 기도 아니고, 무상검법의 기도 아닌 것. 기의 상위 개념. 혹은 기와 기가 아닌 것의 — 경계에 있는 것.

경계.

극마(克魔). 마(魔)를 이기는 것. 이기려면 상대가 있어야 한다. 나와 마. 안과 밖. 이쪽과 저쪽. 경계가 있어야 이기고 질 수 있다.

탈마(脫魔). 마에서 벗어나는 것. 하지만 '벗어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인가. 아니다. 밖으로 나가면 밖이 새로운 안이 된다.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 경계 자체를 지우는 것이다. 안과 밖이 없으면 이기고 지는 것도 없다. 나와 마가 없으면 극복할 것도 없다.

경계를 지우면 — 남는 것은 무엇인가.

이해한 것이 아니었다. 깨달은 것도 아니었다. 죽음의 직전에, 40년간 쌓아올린 모든 것이 무너지면서, 무너진 잔해 사이로 보인 것이었다. 극마의 벽이 사라졌다. 묵향의 기와 벽의 에너지 사이에 있던 경계가 사라졌다. 기가 벽 너머의 에너지와 하나가 되었다. 구분이 없어졌다.

산공의 반대였다. 산공이 모든 것이 흩어지는 것이라면, 이것은 모든 것이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흩어짐의 반대는 모임이 아니라 — 구분의 소멸이었다.

벽이 열렸다. 열렸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았다. 벽과 벽이 아닌 것의 경계가 사라졌다. 그 너머에 — 빛이 있었다.

공허진이 뒤로 물러났다. 벽 너머에서 쏟아져 나오는 에너지의 밀도가 극마의 검강을 압도했다. 기가 아니었다. 기와 같은 것이지만, 기보다 순수한 것. 이 세계의 것이 아닌 것.

묵향의 몸이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공허진은 벽이 다시 닫히는 것을 보았다. 고대 문자의 빛이 사그라들었다. 곧 장로원 호위대가 도착했다. 공허진은 한동안 닫힌 벽을 바라보았다.

"... 탈마인가."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벽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Chapter IV

"Two Moons"

첫 번째로 느낀 것은 공기였다.

다르다. 숨을 들이쉬는 것만으로 온몸에 에너지가 스며드는 감각. 천양대륙의 기와 비슷하지만 결이 달랐다. 더 순수하고, 더 농밀했다. 역혈심법의 순환을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대기 자체가 기를 밀어 넣고 있었다. 이 세계의 공기에 에너지가 녹아 있었다.

눈을 떴다.

숲이었다. 천양대륙의 어떤 숲과도 달랐다. 줄기가 은빛을 띠었고, 잎은 짙은 보랏빛이었다. 나무 사이로 하늘이 보였다. 달이 떠 있었다.

두 개.

하나는 크고 하얗고, 하나는 작고 붉었다. 묵향은 달을 올려다보았다. 어쩌면 55년의 생에서 처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본 것일지 모른다. 별에 관심이 없었고, 하늘에 관심이 없었다. 살수에게 하늘은 불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두 개의 달이 떠 있는 하늘은, 이곳이 천양대륙이 아니라는 가장 명확한 증거였다.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때 느꼈다.

가볍다. 몸이 너무 가볍다. 55세 성인 남성의 체중이 아니다. 시야가 낮다. 지면이 가깝다. 손을 들어 보았다.

작은 손이었다.

하얗고, 가늘고, 흉터가 없는 손. 40년간 칼을 잡아 온 손이 아니었다. 마디가 굵고, 칼자루 자국이 박혀 있던 그 손이 아니었다. 소녀의 손이었다.

숲 사이로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기어가서 수면을 들여다보았다.

열네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의 얼굴이 비쳤다.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로 늘어져 있었다. 하얀 피부. 큰 눈. 묵향의 55세 얼굴이 아니었다. 40년간 어둠 속에서 살아온 남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한참 동안 수면 위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도 같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눈. 무표정에 가까운, 살수의 눈이 소녀의 얼굴 위에 있었다.

벽 너머로 넘어오면서 몸이 바뀌었다. 왜 이런 형태인지는 모른다. 이 세계의 규칙인지, 차원의 문이 대가를 요구한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몸을 확인했다. 옷이 달라져 있었다. 검은 천의 단순한 복장. 허리에 칼이 없었다. 살수도는 — 공허진과의 싸움에서 튕겨져 나간 뒤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저 세계에. 40년의 동반자를 잃었다.

내공을 운용해 보았다. 역혈심법의 순환을 돌렸다. 기가 움직였다. 하지만 경맥의 크기가 줄었다. 단전의 용량이 작아졌다. 소녀의 몸에 맞게 모든 것이 축소되어 있었다. 극마의 내공은 그대로였지만 — 아니. 극마가 아니다. 벽 앞에서 경계를 지운 순간, 기의 질이 달라졌다. 극마보다 한 차원 위. 탈마의 기. 하지만 이 작은 몸으로 그것을 온전히 운용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팔이 짧다. 체중이 없다. 무상검법의 궤적을 그릴 수 없다.

칼을 잃었다. 몸이 바뀌었다. 이 세계가 어디인지 모른다. 무상검법은 이 몸에 맞지 않는다.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기(氣)는 있다. 40년간 쌓아올린 것, 아니, 40년 끝에 경계를 지워 얻은 것. 이 세계의 공기에 녹아 있는 에너지와 내 기가 공명하고 있다. 같은 것이다. 이름이 다를 뿐이다.

숲 너머에서 소리가 들렸다. 말발굽. 갑옷이 부딪히는 소리. 여러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묵향은 본능적으로 숨었다. 나무 뒤에 몸을 낮추고, 기를 죽이고, 기척을 지웠다. 살수의 몸에 새겨진 40년의 습관은, 소녀의 몸이 되어도 변하지 않았다.

말을 탄 자들이 나타났다. 금속 갑옷. 천양대륙에서는 본 적 없는 형태. 기사(騎士). 서역 너머에 그런 무인이 있다는 이야기를 천마신교의 고서에서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천양대륙의 기사가 아니었다. 이들은 이 세계의 존재였다.

기사들의 몸에서 에너지가 느껴졌다. 기와 같은 것. 하지만 운용 방식이 달랐다. 이들은 에너지를 몸 밖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갑옷으로, 말로, 검으로. 에너지가 빛의 형태로 검을 감싸고 있었다. 천양대륙의 무인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방식. 내공은 몸 안에서 순환시키는 것이다. 밖으로 흘려보내면 소모만 된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그것이 자연스러웠다. 이 세계에서는 에너지를 그렇게 쓴다.

기사 중 하나가 말을 세웠다. 고개를 돌려 묵향이 숨은 방향을 보았다. 기를 완벽히 죽였는데도 느낀 건가. 아니다. 이 세계의 대기에 녹아 있는 에너지가 너무 농밀하다. 기를 죽여도, 주변의 에너지가 묵향의 기에 반응하여 미세한 파동을 만들고 있다. 물속에서 아무리 가만히 있어도 물결이 이는 것처럼.

기사가 검을 뽑았다. 검 주위로 빛이 피어올랐다. 에너지가 검을 따라 흐르며 형태를 만들었다. 이 세계의 검강. 원리가 같다. 이름이 다를 뿐이다.

묵향은 판단했다. 적대 의사 불명. 언어 불명. 교전은 불리하다. 칼이 없다.

하지만 기가 있다.

기사가 나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빛이 은빛 줄기를 반으로 갈랐다. 묵향은 움직였다. 소녀의 몸으로. 발에 기를 모아 지면을 찼다. 경공. 소녀의 체중은 가볍다. 가벼움이 이번에는 이점이었다. 바람처럼 빠져나갔다. 기사들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데 한 호흡이 걸리지 않았다.

쾌(快). 빠름은 변하지 않는다. 몸이 바뀌어도.

기사들이 소리를 질렀다. 알 수 없는 언어. 하지만 톤은 읽을 수 있었다. 놀람. 경계. 그리고 — 두려움. 눈앞에서 사람이 사라지는 것을 이 세계의 사람들은 처음 본 모양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기를 밖으로 쓴다. 안에서 순환시키는 방법을 모른다. 경공도, 은신도 모른다.

에너지의 본질은 같다. 운용 방식이 다를 뿐이다. 이들은 밖으로 쓴다. 나는 안에서 쓴다. 이 세계에서 나의 무공은 — 다르다. 비표준이다.

숲을 벗어나 언덕 위에 올라섰다. 아래로 넓은 평원이 펼쳐졌다. 평원 너머에 도시가 보였다. 높은 탑, 성벽, 깃발. 천양대륙의 어떤 도시와도 닮지 않은 곳.

새로운 세계.

소녀의 얼굴 위에 살수의 눈이 빛났다. 두 개의 달 아래, 바람이 검은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40년간 어둠 속에서 칼만 갈았던 남자가, 빛의 세계에 서 있었다. 소녀의 모습으로.

칼이 없었다. 하지만 기가 있었다. 이름이 없었다. 하지만 40년이 있었다. 무상검법은 이 몸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무상(無相)의 원리 — 형태가 없으므로, 어떤 형태로든 다시 만들 수 있다.

묵향은 도시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 세계가 묵향을 어떻게 부르게 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어둠에서 온 자,
빛의 세계에 서다

칼이 없어도 기가 있다. 몸이 바뀌어도 40년은 변하지 않는다. 천마신교의 살수 묵향은 아직 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