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ture cashcow — fiction 05

사업계획서를 쓰는

투자 요청 금액 3억원.
새벽 4시, 29,000원으로 시작한 여정의 마지막 페이지.

Part I
숫자의 무게
한도현 34 / dev lead (team: 0) / nextvision inc.

노트북 화면에 흰 페이지가 떠 있었다.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오후 9시 47분. 사무실에는 도현밖에 없었다. 아니, 대표도 있었다. 대표 방에서 새어나오는 형광등 불빛이 복도 바닥을 길게 물들이고 있었다.

투자자 이정민이 명함을 건네며 말했던 문장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사업계획서 보내주세요." 일주일 전이었다. 데모가 한 번 터지고, 한 번 살아난 그 수요일 오후. 도현은 그날 이후 매일 밤 이 화면 앞에 앉았다. 그리고 매일 밤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집에 갔다.

코드는 쓸 수 있었다. API 엔드포인트, 데이터베이스 스키마, 에러 핸들링. 그런 건 손이 알아서 움직였다. 하지만 사업계획서는 달랐다. 숫자를 써야 했다. 코드의 숫자가 아니라, 돈의 숫자.

TAM. Total Addressable Market. 전체 시장 규모. 이걸 어떻게 추정하지?

도현은 Claude에게 물었다.

Claude
한국 SI/IT 서비스 시장 규모는 2025년 기준 약 18조 원입니다. 이 중 견적/제안서 자동화와 관련된 세그먼트는 전체의 약 8~12%로 추산할 수 있습니다. TAM은 약 1.8~2.2조 원 범위로 설정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1.8조 원. 도현은 그 숫자를 타이핑했다가 지웠다. 다시 타이핑했다가 또 지웠다. 1.8조 원짜리 시장에 월급 268만 원짜리 개발자가 뛰어든다. 뭔가 우스웠다.

QuoteMate Business Plan — Draft v0.3
1. Market Size
TAM (전체 시장) — 1.8조 원
한국 IT 서비스/SI 시장 내 견적 자동화 세그먼트
2. SAM (유효 시장)
SAM — 2,400억 원
직원 10~100명 규모 IT 기업 중 견적서를 월 10건 이상 작성하는 기업
3. SOM (초기 목표 시장)
SOM — 36억 원
수도권 중소 IT 기업 300개사, 월 구독 10만 원 기준

Claude가 만들어준 숫자들은 그럴듯했다. 하지만 도현은 알고 있었다. 이 숫자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자기가 판단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SAM 2,400억 원이 현실적인 숫자인지, AI가 그럴듯하게 만들어낸 허상인지. 도현은 숫자를 검증할 방법을 몰랐다. 검증할 방법을 모른다는 사실조차 불안했다.

"경쟁사 분석도 넣어야 되나."

혼잣말이었다. 도현은 구글에 '견적서 자동화 SaaS'를 검색했다. 결과가 쏟아졌다. 비드잇, 코스트메이트, 오토견적, 그리고 이름도 못 들어본 서비스 열두 개. 대부분 시리즈A 이상의 투자를 받은 곳들이었다. 팀 규모 10~30명. 데이터 센터 자체 운영. 엔터프라이즈 영업팀 보유.

나는 혼자다. 팀원 0명. 서버는 Supabase 무료 티어. 차별점이 뭐지?

도현은 다시 Claude에게 물었다. Claude는 "비용 효율성"과 "AI 네이티브 아키텍처"를 차별점으로 제안했다. 맞는 말이었다. 투자자 이정민도 그 부분에 관심을 보였다. "월 운영비가 $6이라고요?" 그때 이정민의 눈이 반짝였던 건 분명했다.

하지만 그 $6이 문제였다.

···

재무 추정 시트를 열었다. 도현이 제일 두려워하던 페이지였다.

지금까지 QuoteMate의 월 운영 비용은 사실상 0원이었다. Supabase Free, Vercel Free, OpenRouter 무료 모델. 개인 비용으로 Claude Pro $20만 내고 있었다. 하지만 투자를 받고 실제 고객을 받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단계 인프라 비용 월 합계
현재 (MVP) Supabase Free + Vercel Free $0/월
고객 10명 Supabase Pro $25 + Vercel Pro $20 $45/월
고객 50명 + AI API $80 + 도메인 $1 $126/월
고객 100명 + AI API $200 + 모니터링 $20 $265/월
고객 500명 Supabase Team + 전용 AI + CDN $1,200+/월

$0에서 $45. 45달러. 한화로 약 6만 5천 원. 고객이 10명만 생겨도 무료 티어로는 불가능했다. Supabase Free의 500MB는 데모용이었지, 서비스용이 아니었다. 7일 미사용 시 일시정지되는 데이터베이스 위에 고객의 견적 데이터를 올릴 수는 없었다.

성공하면 월 $45부터 시작이다. 실패하면 $0이고.

도현은 Claude에게 3년 재무 추정을 요청했다.

Claude가 뽑아준 3년 재무 추정이 화면에 떠 있었다. 1년차: 고객 80명, MRR 800만 원, 손익분기 8~10개월. 2년차: 고객 300명, ARR 3.6억 원, 개발자 1명 추가. 3년차: 고객 800명, ARR 9.6억 원, 팀 6명. 숫자가 화면에 떠 있었다. 도현은 한참을 바라보았다.

월 유료 고객 100명 확보. 그게 1년차 목표였다. 현실적인가? 한국에 직원 10~100명 규모의 IT 기업이 몇 개나 되는지 도현은 정확히 몰랐다. Claude는 약 12,000개라고 했다. 그중 0.7%만 쓰면 80명이다. 0.7%.

0.7%라. 3%도 아니고 0.7%. 이걸 '현실적'이라고 쓸 수 있나?

도현은 "현실적"이라고 타이핑했다. 손가락이 약간 떨렸는지는 알 수 없다.

Part II
대표와의 대화

밤 9시 30분.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섰다가 복도에서 대표와 마주쳤다. 김영수 대표. 55세. 넥스트비전의 창업자이자 유일한 주주. 양복 상의는 이미 벗어놓았고, 반팔 와이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모습이었다.

"도현아, 너 아직 있었어?"

"네. 사업계획서 쓰고 있습니다."

"아. 그거."

대표가 멈칫했다. 평소 같으면 "좋아! 잘 해봐!"라고 어깨를 두드렸을 것이다. 대표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대표가 잠시 도현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커피 한잔 할까?"

대표 방은 넓었다. 넓다기보다 다른 공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넓었다. 12명짜리 회사에서 대표 방이 가장 넓다는 건 어디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벽에는 정보통신 관련 상장 세 개와 중소기업 기술혁신상 패가 걸려 있었다. 2019년 것이 마지막이었다.

대표가 인스턴트 커피를 탔다. 두 잔. 설탕 두 스푼. 도현은 블랙을 마셨지만 말하지 않았다. 받았다.

"다 써졌어?"

"아뇨. 재무 추정에서 막혔습니다."

"재무 추정이 뭔데?"

"3년 뒤에 얼마 벌겠다, 뭐 그런 겁니다."

"아. 그거 대충 써. 어차피 아무도 안 믿어."

도현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달았다.

"대표님도 써보셨어요? 사업계획서."

김영수가 웃었다. 입꼬리가 약간 올라간 정도의, 거의 웃음이 아닌 웃음.

"2008년에 넥스트비전 만들 때 썼지. 은행 대출 받으려고. 그때는 워드로 썼다. 한글 97이었나. A4 열다섯 장. 시장 규모니 뭐니 다 넣었는데, 은행 담당자가 한마디 하더라고."

"뭐라고요?"

"담보가 뭡니까."

둘 다 웃었다. 도현은 진짜로 웃었고, 대표도 진짜로 웃은 것 같았다.

···

침묵이 길었다. 대표가 커피를 내려놓았다. 책상 위에는 견적서 서류 뭉치와 세금계산서 폴더가 쌓여 있었다. 그 옆에 종이 메모가 붙어 있었는데, "11월 인건비" 옆에 빨간 볼펜으로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도현아."

"네."

"나도 안다."

대표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평소의 에너지 넘치는 톤이 아니었다. 조용하고, 낮고, 약간 거칠었다.

"매날 허무맹랑한 소리 한다는 거. AI니 플랫폼이니 메타버스니. 직원들이 뒤에서 뭐라 하는지 내가 모를 것 같아? 대표가 또 유튜브 보고 왔다. 이번 달 미래먹거리가 뭔지 보자. 그런 거."

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개발팀 카톡에서 — 팀원이 없으니 사실상 전사 단톡에서 — "대표님의 미래먹거리" 밈은 이미 정착해 있었다.

"근데 말이야."

대표가 창밖을 보았다. 금천구 가산디지털단지의 야경이랄 것도 없는 야경. 맞은편 건물의 형광등이 몇 개 켜져 있었다. 다른 회사도 야근 중이다.

"이대로 SI만 하다가는 진짜 끝이야."

도현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SI 단가가 해마다 내려가. 알지? 5년 전에 인월 800 받던 거 지금 550이야. 근데 월급은 올려줘야 돼. 4대 보험은 올라가지. 사무실 임대료도 올라가지. 매년 쥐어짜는데 한계가 있어."

대표는 설탕 커피를 다 마셨다. 종이컵을 손으로 구겼다가 다시 폈다.

"직원이 열두 명이야. 열두 명이 각자 가족이 있고, 대출이 있고, 애가 있어. 내가 매달 그 무게를 지고 있어. SI 들어오면 사람 투입하고, 빠지면 대기 타고. 대기 타는 동안에도 월급은 나가야 돼."

도현은 그 말을 들으며 처음으로 대표의 책상 위 숫자들이 보였다. 인건비, 임대료, 보험료, 세금. 매달 나가는 돈. 매출이 아무리 8억이라도 순이익은 거의 없다는 걸 도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달랐다.

"그래서 미래먹거리를 찾는 거야. 허무맹랑한 거 맞아. 메타버스는 좀 그랬지."

둘 다 웃었다. 이번에는 쓴웃음이었다. 2022년에 대표가 '넥스트비전 메타버스 사업부'를 만들겠다고 했던 날, 도현은 사직서를 쓸 뻔했다.

"근데 AI는 달라. 이건 진짜야. 나는 기술은 모르지만, 시장이 움직이는 건 30년 동안 봐왔어. 지금 안 움직이면 3년 뒤에는 없어져."

대표가 도현을 바라보았다.

"네가 만든 그 견적 프로그램. 이름이 뭐였지."

"QuoteMate입니다."

"그래, 쿼트메이트. 저번에 투자자한테 보여줬을 때 나 사실 좀 떨렸어."

도현은 놀랐다. 대표가 떨렸다는 말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내가 18년 동안 못 한 걸 네가 한 달 만에 한 거잖아. 우리 자체 서비스. 우리 이름으로 된 프로그램. SI 하청이 아니라, 진짜 우리 거."

대표의 눈이 약간 붉었다. 형광등 탓인지 아닌지 도현은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

"잘 써. 사업계획서. 내가 도울 건 없지만. 숫자 부분은 경리 이 과장한테 물어봐. 재무제표 있으면 좀 더 그럴듯하다고, 예전에 은행에서 그러더라."

"네. 감사합니다."

"커피 더 줄까?"

"아뇨. 괜찮습니다."

도현은 대표 방을 나왔다. 복도가 어두웠다. 센서등이 늦게 켜졌다. 도현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면서, 3,800만 원짜리 연봉의 무게가 조금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무게가 달라진 게 아니라 무게를 느끼는 방식이 달라졌다. 자기만 무거운 줄 알았는데, 대표도 무거웠다. 55세의 무게와 34세의 무게는 종류가 달랐다.

Part III
죽음의 계곡

금요일 밤. 강남역 근처 호프집. 대학 동기 박성준이 맥주를 따르고 있었다.

박성준 34 / backend dev / enterprise corp. / 5yr

성준은 직원 3,000명짜리 IT 대기업에 다녔다. 같은 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에 취업했다. 성준은 대기업에, 도현은 넥스트비전에 갔다. 그때는 별 차이 없을 줄 알았다.

"야, 너 아직도 거기 있어?"

성준의 첫 마디는 늘 이거였다. 만날 때마다.

"응. 아직."

"대단하다, 진심으로."

비꼬는 게 아니었다. 성준은 진심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게 더 불편했다.

"우리 회사 Copilot Business 깔아줬어."

"아. 좋겠다."

"$19짜리. 유저당 $19. 우리 팀 20명이니까 회사가 매달 $380 내는 거지. 그리고 있잖아, 옆 팀 김 선임은 Claude Max 쓰더라. $200짜리."

"회사에서 대줘?"

"아니, 개인 돈. 근데 그 사람 연봉이 8천이니까 $200이 뭐. 2%도 안 되잖아."

나는 월급의 1.2%로 Claude Pro를 쓴다. 개인 카드로. $200은 월급의 11.6%다.

도현은 맥주를 마셨다. 쓴맛이 좋았다.

"성준아, 나 사업계획서 쓰고 있어."

성준이 잔을 내려놓았다.

"뭐? 이직이야?"

"아니. 사이드 프로젝트. 투자자가 관심 보여서."

"미쳤어? 스타트업 하려고?"

성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성준은 스타트업 출신이 아니었지만, 스타트업에서 온 동기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시리즈B 직전에 대표가 야반도주한 이야기. 시드 투자 받고 6개월 만에 피봇 세 번 한 이야기. 월급이 3개월째 밀린 이야기.

"투자 받으면 회사 나올 거야?"

"아직 모르겠어. 투자가 될지도 모르고."

"안 되면?"

"안 되면 원래대로지. 넥스트비전 개발팀장. 팀원 0명."

성준이 웃었다. 도현도 웃었다.

"근데 야. 회사에서 나와서 창업하는 거랑, 회사 안에서 하는 거랑, 완전 다르다? 우리 회사 사내벤처도 한 팀 있었는데, 1년 만에 접었거든."

"그건 대기업이라 가능한 거잖아. 우리 회사에 사내벤처 같은 거 있을 리가."

"그러니까 문제지. 너 지금 개인 돈 써서 회사 프로젝트 하는 거잖아. 투자 받으면 그게 네 거야 회사 거야?"

도현은 맥주를 마시다 멈췄다. 그 문제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QuoteMate의 코드는 도현이 전부 작성했다. 퇴근 후에, 개인 노트북으로, 개인이 결제한 Claude Pro로. 하지만 아이디어의 시작점은 대표의 '미래먹거리'였고, 고객 타겟은 넥스트비전 같은 SI 기업이었다.

"모르겠다. 근데 대표님이랑 어제 얘기했는데... 그 사람도 진심이더라."

"55세에 직원 12명이면, 뭐. 진심이겠지."

···

집에 돌아와서 도현은 노트북을 열었다. 새벽 1시. 맥주 세 잔의 알코올이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대신, 이상하게 타이핑 속도를 올려주었다.

'스타트업 투자 현실'을 검색했다.

THE VC — 2025 Korea Startup Report
2025년 한국 스타트업 투자 건수: 1,155건. 전년 대비 -33%.
시드 투자 규모: 1~5억 원. 기업가치: 수억~십수억 원.
시리즈A 투자 규모: 5~50억 원.
시드에서 시리즈A까지 평균 소요 기간: 18~24개월.
Death Valley — Startup Mortality
일반 신생기업 5년 생존율: 34.7% (중기부, 2024).
AI 스타트업 3년 생존율: 56.2% (한국경제, 2025).
시드에서 시리즈A로 진행하는 비율: 약 20~30%.
나머지 70~80%는 시드와 시리즈A 사이의 "죽음의 계곡"에서 사라진다.

5년 뒤 3명 중 1명만 살아남는다. AI 스타트업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56.2%가 3년을 버티지만, 그건 투자를 받은 기업의 이야기다. 투자를 받지 못한 기업은 통계에 잡히지도 않는다.

투자가 안 되면, 나는 통계에 잡히지도 않는 쪽이 된다.

도현은 사업계획서의 리스크 분석 페이지를 열었다. Claude가 작성을 도와주고 있었다.

Claude
주요 리스크 요인:
1) 시장 리스크 — 견적 자동화 SaaS의 PMF 미검증
2) 기술 리스크 — 1인 개발 체제의 확장성 한계
3) 자금 리스크 — 시드 이후 후속 투자 확보 불확실
4) 경쟁 리스크 — 기존 플레이어 대비 브랜드 인지도 부재

전부 맞는 말이었다. 도현은 리스크 항목을 읽으며 하나씩 고개를 끄덕였다. PMF 미검증. 맞다. 실제 유료 고객이 단 한 명도 없다. 1인 개발. 맞다. 도현이 버스에 치이면 QuoteMate도 끝난다. 후속 투자 불확실. 맞다. 시드를 받아도 18개월 안에 시리즈A를 못 만들면 죽는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다섯 번째 리스크를 Claude는 쓰지 않았다.

나는 회사를 나올 수 있는가?

넥스트비전에서 나가면 연봉 3,800만 원이 사라진다. 서울에서 월 268만 원은 많지 않지만, 없으면 큰일나는 돈이다. 월세, 통신비, 식비, 국민연금, 건강보험. 퇴직하면 지역가입자로 전환되니까 건강보험료가 올라간다. 실업급여? 자발적 퇴직이니까 나올지 모른다.

그렇다고 회사에 남으면서 사이드로 계속할 수 있을까. 지금도 퇴근 후 자정~새벽 코딩이다. 고객이 생기면 낮에 문의가 올 것이다. 회의 중에 고객 이메일에 답장할 수는 없다.

두 개의 세계 사이에 도현이 서 있었다. 한쪽은 3,800만 원의 안정. 다른 쪽은 3억 원의 가능성. 그리고 그 사이에 죽음의 계곡이 있었다.

Part IV
보내기

토요일 밤. 아니, 정확히는 일요일 새벽. 시계는 2시 14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도현의 원룸 책상 위에 캔커피 세 개가 비어 있었다.

사업계획서는 42페이지가 되었다. 처음 계획은 20페이지였지만, Claude와 주고받으며 내용이 불어났다. 시장 분석 8페이지. 제품 소개 6페이지. 기술 아키텍처 4페이지. 비즈니스 모델 4페이지. 경쟁 분석 5페이지. 재무 추정 6페이지. 팀 소개 3페이지. 리스크 분석과 대응 전략 4페이지. 투자 요청과 사용 계획 2페이지.

팀 소개 페이지가 가장 얇았다. 쓸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Section 7 — Team
CTO / 한도현
풀스택 개발자. (주)넥스트비전 4년, SI 프로젝트 12건 리드.
Next.js, Supabase, Python, OpenAI API, LangChain 활용 가능.
QuoteMate의 전체 아키텍처 설계, 개발, 운영을 1인 수행.
CEO / 김영수
(주)넥스트비전 대표이사. IT 서비스 업계 30년.
SI 프로젝트 200건+ 수행. 중소 IT 기업 시장에 대한 깊은 이해.
견적/제안서 자동화 서비스의 타겟 고객과 동일한 네트워크 보유.

CEO 김영수. 도현은 그 이름을 타이핑할 때 잠시 손을 멈췄다. 대표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사업계획서에 대표를 CEO로 넣었다는 것을. 투자자 이정민이 "대표님도 참여하시는 건가요?"라고 물었을 때, 도현은 "아직 논의 중입니다"라고 답했다. 논의한 적이 없었다.

대표님이 OK 하면 넥스트비전 안에서 하는 거고. 안 하면 나 혼자 나가는 거다.

도현은 그 문제를 나중으로 미뤘다. 사업계획서를 보내는 게 먼저였다.

···

새벽 3시. 투자 요청 페이지.

Section 9 — Funding Request
투자 요청 금액
3억 원 (시드 라운드)
사용 계획
제품 개발 고도화: 40% (1.2억 원)
인건비 (개발자 1명 채용): 30% (9,000만 원)
마케팅/영업: 20% (6,000만 원)
인프라/운영: 10% (3,000만 원)
기대 성과
투자 후 12개월: 유료 고객 100개사, MRR 1,000만 원
투자 후 24개월: 유료 고객 300개사, ARR 3.6억 원, 시리즈A 준비

3억 원. 도현은 그 숫자를 한참 바라보았다. 월급의 112배. 넥스트비전 연 매출의 37.5%. 대표가 은행에서 대출받으려고 열다섯 장짜리 사업계획서를 썼던 2008년, 그때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숫자들이 머릿속에서 정렬되었다. 시리즈의 처음부터 도현을 따라다녔던 숫자들.

268만 원. 세후 월급.

1.2%. Claude Pro가 월급에서 차지하는 비율.

500MB. Supabase 무료 티어의 용량 한도.

32분. 데모 당일 Supabase가 일시정지에서 복구되기까지 걸린 시간.

3%. 시스코가 말한 AI 준비 완료 한국 기업의 비율.

29,000원. 모든 것이 시작된 금액.

···

새벽 3시 40분. 도현은 사업계획서를 PDF로 변환했다. 42페이지. 파일 크기 4.2MB. 첨부 파일 용량 제한에 걸리지 않는 크기인지 확인했다. Gmail은 25MB까지다. 괜찮다.

이메일을 열었다.

도현은 이메일 본문을 세 번 고쳐 썼다. 첫 번째는 너무 격식이 차려져서 지웠다. 두 번째는 너무 캐주얼해서 지웠다. 세 번째는 그냥 뒀다.

Email Body
이정민 대표님,

지난 수요일 데모에서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사업계획서를 첨부해 드립니다.

제품, 시장, 재무 추정을 포함한 42페이지 분량이며,
추가 질문이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도현 드림

간결했다. Claude는 더 길게 쓰라고 했지만 도현은 그대로 뒀다. 42페이지에 할 말은 다 했다.

···

새벽 4시 2분.

커서가 보내기 버튼 위에 있었다. 도현의 손이 트랙패드 위에 얹혀 있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원룸이 조용했다. 냉장고 모터 소리만 낮게 울렸다. 노트북 화면의 밝기가 방 전체를 밝히고 있었다.

도현은 사업계획서의 파일명을 다시 보았다. QuoteMate_BusinessPlan_v1.0.pdf. v1.0이라고 썼지만 실제로는 v0.3에서 시작해서 스물네 번을 고쳤다. Claude가 열여덟 번 도와줬고, 도현이 여섯 번 혼자 고쳤다. 새벽마다. 퇴근 후마다. 점심시간에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한 번.

29,000원으로 시작했다.

한 달 전, Claude Pro를 결제하던 날이 떠올랐다. 개인 카드. 회사에서 쓸 도구를 개인 돈으로 사면서 느꼈던 자괴감. 하지만 그 29,000원이 레거시 코드 리팩토링 30분을 만들었고, 30분이 QuoteMate의 첫 번째 커밋을 만들었고, 첫 번째 커밋이 데모를 만들었고, 데모가 이 이메일을 만들었다.

월급의 1.2%.

도현의 손가락이 트랙패드를 눌렀다.

화면이 바뀌었다. "메일이 전송되었습니다."

도현은 노트북을 닫지 않았다. 화면을 바라보았다. 전송 완료 메시지가 떠 있었다. 4시 3분.

투자가 될지는 몰랐다. 이정민이 42페이지를 전부 읽을지도 몰랐다. 다음 주에 "죄송하지만 저희와는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라는 메일이 올 수도 있었다. 죽음의 계곡의 70%에 속할 수도 있었다. 5년 뒤 34.7%의 바깥에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보냈다.

도현은 노트북을 닫았다. 원룸이 어두워졌다. 냉장고 모터가 멈춘 뒤 다시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창밖으로 새벽 하늘이 아주 약간, 진짜 아주 약간 밝아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빈 캔커피 세 개를 정리하고, 이를 닦고, 이불을 덮었다.

잠들기 직전, 도현은 내일 할 일을 떠올렸다. 일요일이었다. 넥스트비전은 쉬는 날이다. ERP 서버 점검도 없고, 대표의 카톡 폭격도 — 아마 — 없을 것이다.

그냥 자기로 했다.

내일 일은 내일의 도현이 할 것이다. 3억 원짜리 이메일을 보낸 도현이 아니라, 월급 268만 원짜리 넥스트비전 개발팀장 한도현이.

팀원은 여전히 0명이다.

29,000원으로 시작했다
월급의 1.2%

투자가 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보냈다. 그것으로 충분한 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