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uture cashcow — fiction 01

대표님, 그건 ChatGPT가 아닙니다

개발팀장(팀원 0명). 월급 268만원. 겸직 5개.
AI 예산 0원인 중소기업에서, 대표의 '미래먹거리' 요구가 시작된다.

Part I

"개발팀장 (팀원 0명)"

한도현 34 · dev team lead (solo) · si subcontract · gyeonggi-do

2026년 2월 10일 월요일 오전 8시 47분.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한도현은 사무실 문을 열기 전에 자판기 커피를 뽑았다. 300원. 회사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이디야조차 사치라서 몇 달 전부터 자판기로 바꿨다. 블랙 버튼을 눌렀다. 기계가 3초간 신음을 내더니 갈색 액체를 종이컵에 쏟았다. 이것으로 오전을 버틴다.

넥스트비전. 3층 건물의 2층 전체를 쓰는 이 회사의 정식 명칭은 (주)넥스트비전이고, 사업자등록증에는 "소프트웨어 개발 및 컨설팅"이라고 적혀 있다. 실제로 하는 일은 SI 하청과 ERP 유지보수다. 연매출 8억. 직원 12명. 그중 개발자는 한도현 한 명이다.

company profile
회사명 (주)넥스트비전 설립 2011년 대표 김영수 (55) 연매출 약 8억 원 직원 12명 사업 SI 하청 + ERP 유지보수 개발팀 팀장 1명 (팀원 0명) AI 예산 0원

8시 55분. 도현은 자리에 앉았다. 22인치 모니터 한 대, 5년 된 데스크탑, 기계식이 아닌 멤브레인 키보드. 모니터 왼쪽에는 포스트잇이 7장 붙어 있다. "ERP 거래처 코드 오류 — 김과장", "3층 프린터 드라이버 재설치", "신입 김하은 PC 세팅", "택배 송장 번호 양식 수정", "대표님 노트북 와이파이 안 됨", "경리 박주임 엑셀 매크로 수정", "건강보험 정산 파일 변환". 7장 중 코딩과 관련된 것은 1장이다.

도현의 명함에는 "개발팀장"이라고 적혀 있다. 팀원은 0명이다. 2년 전에 있었던 후임 개발자가 네이버 계열사로 이직했다. 대표는 "곧 충원하겠다"고 했다. 2년이 지났다. 충원 대신 도현의 직함이 "개발팀장"이 되었다. 직함이 올라간 날 연봉이 올랐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200만원 올랐다. 3,600만원에서 3,800만원으로. 세후 월급 약 268만원.

대기업 신입 연봉 6,000만원. 내 4년차 연봉 3,800만원. 차이 2,200만원. 숫자로 보면 단순하다. 하지만 이 숫자는 매일 아침 300원짜리 자판기 커피와, 점심에 6,500원 이하 메뉴만 고르는 습관과, 경조사비를 낼 때마다 통장 잔고를 확인하는 동작으로 번역된다.

9시 정각. 출근한 순서대로 사무실이 채워진다. 영업팀 3명. 기획팀 2명. 관리팀 2명. 경리 1명. 디자이너 1명. 그리고 대표 비서 겸 총무 1명. 대표를 포함해 12명. 도현은 이 12명 중 유일한 개발자이자, 유일한 IT 담당이자, 비공식 전산실장이다.

9시 3분. 첫 번째 요청이 들어왔다.

"도현 씨, 3층 회의실 프린터가 또 안 돼요."

관리팀 이주임이 도현의 자리로 왔다. 도현은 자판기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일어섰다. 3층으로 올라갔다. 프린터 전원을 껐다 켰다. USB 케이블을 뽑았다 꽂았다. 드라이버를 재설치했다. 15분. 내려왔다.

9시 22분. 두 번째 요청.

"팀장님, ERP에서 거래처 코드가 중복 등록됐는데요. '삼일물류'가 두 개예요."

영업팀 김과장이 내선전화를 걸어왔다. 도현은 ERP 관리자 페이지에 접속했다. 거래처 테이블에서 '삼일물류'를 검색했다. 코드 A-1047과 A-1089. 하나는 2019년에 등록되었고, 하나는 지난주에 등록되었다. 지난주 것을 등록한 사람은 신입 영업사원이다. 도현은 중복 코드를 병합하고, 관련 매출 전표 3건을 수정하고, 김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받았다. 28분.

9시 54분. 세 번째 요청.

"도현아, 내 노트북 와이파이가 자꾸 끊겨."

대표 김영수가 대표실 문을 열고 고개만 내밀었다. 도현은 대표실에 들어갔다. LG 그램. 와이파이 어댑터 드라이버가 지난주 윈도우 업데이트 이후 꼬인 것이다. 장치 관리자에서 드라이버를 롤백했다. 12분. 대표는 모니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아 참, 오늘 조회 때 할 얘기 있으니까 빠지지 마."

10시 8분. 도현은 자리에 돌아와서 모니터를 보았다. 원래 오전에 해야 할 일은 SI 프로젝트의 API 수정이다. 거래처에서 요청한 재고 조회 API에 페이지네이션을 추가해야 한다. 납기는 이번 주 금요일. 코딩에 필요한 순수 시간은 약 4시간. 하지만 도현이 코딩에 쓸 수 있는 시간은 보통 오후 6시 이후다. 다른 시간은 전부 겸직 업무에 빼앗긴다.

직함: 개발팀장. 실제 업무: 풀스택 개발 + 서버 관리 + PC 수리 + ERP 관리 + 인사/총무 보조. 이것을 겸직이라고 부르기엔 비율이 이상하다. 코딩 20%, 잡무 80%. 정확히 말하면 나는 개발팀장이 아니라 전산잡무총괄이다.

10시 30분. 월요 조회. 12명이 회의실에 모였다. 대표 김영수가 맨 앞에 섰다. 55세. 키 171센티미터, 약간의 배. 넥타이를 맨 날은 거래처 미팅이 있는 날이고, 오늘은 넥타이가 없다. 셔츠 소매를 반쯤 걷고 서 있는 모습이 "나는 현장 사람이다"라는 메시지를 보내려는 것처럼 보인다.

도현은 회의실 구석 의자에 앉았다. 조회는 보통 15분이다. 대표가 이번 주 영업 현황을 묻고, 김과장이 답하고, 이번 달 매출 전망을 확인하고 끝난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자, 오늘은 중요한 얘기가 있어."

김영수 대표가 말했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 * *

Part II

"미래먹거리"

김영수 대표가 회의실 TV에 유튜브 화면을 띄웠다. 크롬캐스트가 연결되는 데 2분이 걸렸다. 도현이 일어나서 HDMI 케이블을 직접 연결했다. 30초 만에 화면이 나왔다.

"고마워, 도현아." 대표가 리모컨을 들고 말했다. "여러분, 이번 주말에 내가 유튜브를 좀 봤어."

시작됐다.

도현의 등이 의자 등받이에 닿았다. '대표가 주말에 유튜브를 봤다'는 문장은 넥스트비전에서 재난 경보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작년에 대표가 "메타버스" 영상을 보고 온 다음 주에 도현은 3D 아바타 프로토타입을 만들어야 했다. 2주 후 대표가 잊었다. 그 전에는 "블록체인" 영상을 보고 왔다. 도현은 사내 포인트 시스템을 블록체인으로 만들어보라는 지시를 받았다. 직원 12명의 포인트 시스템에 블록체인이라니. 1주일 뒤 대표가 잊었다.

이번에는 AI다. 도현은 알고 있었다. 지난주 금요일부터 대표의 카카오톡이 폭격을 시작했으니까.

단톡 — 넥스트비전 전체
김영수 대표 금 21:47
이거 다들 한번 봐봐
김영수 대표 금 22:13
이것도
김영수 대표 토 08:31
도현아 이거 우리도 할 수 있는거 아니야?
김영수 대표 토 09:02
GPT한테 시키면 코딩 다 해준다며?
김영수 대표 토 14:18
이거 진짜 대박이다
김영수 대표 일 11:45
월요일에 얘기하자. AI 관련.

금요일 밤부터 일요일까지 6건. 도현은 그 카톡들을 보며 답장을 하지 않았다. 토요일 오전에 "네 확인했습니다"라고만 쳤다. 경험상 이럴 때 구체적인 답을 하면 대표의 기대치만 올라간다.

회의실에서 대표가 말을 이었다.

"요즘 뉴스 보면 AI 안 하는 회사가 없어. 삼성도 AI 하고, 현대도 AI 하고, 네이버도 AI 하잖아. 우리가 이대로 SI 하청만 하면 5년 뒤에 없어진다고."

영업팀 김과장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기획팀 박대리가 노트북 화면을 보는 척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디자이너 정유진이 펜을 돌리고 있었다.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대표의 '미래먹거리' 선언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 2025 중소기업 디지털 전환 실태조사
한국 중소기업의 AI 활용률은 28.7%로 전년 대비 8.2%p 상승했다. 다만 실제 비즈니스 프로세스에 AI를 통합하여 활용하는 비율은 11.3%에 그쳤으며, AI 도입 준비가 완료된 기업은 전체의 3%에 불과했다. 주요 도입 장벽은 예산 부족(67%), 전문 인력 부족(58%), 활용 방안 불명확(52%) 순이었다.

AI 준비 완료 기업 3%. 넥스트비전은 나머지 97%에 속한다. 아니, 97%라고 하기도 민망하다. 28.7%에 포함되려면 최소한 ChatGPT라도 업무에 써본 적이 있어야 하는데, 넥스트비전에서 AI를 업무에 쓰는 사람은 도현 한 명뿐이다. 도현은 코딩할 때 무료 버전 Claude를 가끔 쓴다. "가끔"이라는 것은 일주일에 두세 번, 에러 메시지를 복사해서 붙여넣는 정도다.

"우리도 AI를 해야 돼." 대표가 말했다. "미래먹거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SI 하청은 한계가 있어. AI 시대에 우리만 가만히 있으면 도태된다."

대표가 "미래먹거리"라는 단어를 쓸 때마다 도현의 어깨가 0.5밀리미터씩 올라갔다. 미래먹거리. 대표가 좋아하는 단어 3개를 꼽으라면 "미래먹거리", "플랫폼", "시너지"다. 이 세 단어가 한 문장에 들어가면 도현의 야근이 확정된다.

"도현아."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네."

"AI 관련해서 우리가 뭘 할 수 있는지 좀 정리해봐. 다음 주까지."

도현은 1초간 대표를 보았다. 대표의 눈은 진지했다. 유튜브를 3일 동안 몰아본 사람 특유의, 세상의 비밀을 발견한 듯한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한국 기업의 99.9%가 중소기업이다. 전체 고용의 81%를 차지한다. 그리고 그 중소기업의 AI 준비 완료율이 3%다. 우리 대표는 3%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유튜브에서 본 삼성과 네이버를 따라하고 싶은 것이다. 연매출 8억인 회사가.

조회가 끝났다. 직원들이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기획팀 박대리가 도현 옆을 지나가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형, 이번엔 뭐야. 메타버스 다음이 AI야?"

"그런 것 같아."

"몇 주 가려나."

"모르지."

박대리가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도현은 웃지 않았다. 메타버스와 블록체인은 대표가 2주 만에 잊었다. 하지만 AI는 다르다. AI는 뉴스에서 매일 나온다. 유튜브에서 매일 나온다. 대표가 잊기 전에 새로운 자극이 계속 들어온다. 이번에는 2주 만에 안 끝난다.

* * *

Part III

"ChatGPT는 AI가 아닙니다"

12시. 점심시간이다. 도현은 기획팀 박대리, 디자이너 유진과 함께 회사 앞 백반집에 갔다. 넥스트비전 직원들이 가는 점심 가게는 세 곳이다. 6,500원 백반집, 7,000원 김치찌개집, 그리고 도현이 주머니가 가벼운 날 가는 편의점. 오늘은 백반집이다.

된장찌개에 밥, 김치, 멸치볶음, 시금치나물. 반찬이 매일 비슷하지만 불만인 사람은 없다. 12인짜리 회사에서 구내식당을 바라는 건 사치다.

"형, 오전에 대표님 뭐래요? 미래먹거리?" 박대리가 된장찌개를 떠먹으며 물었다.

"어. AI 하자고."

"AI요? 우리가?" 유진이 눈을 크게 떴다. "예산은요?"

"0원."

셋이 동시에 밥을 입에 넣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백반집 TV에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삼성전자, AI 반도체 투자 5조 원 확대."

"5조 원이래." 박대리가 TV를 가리켰다.

"우리 연매출의 6,250배네." 도현이 말했다.

셋이 웃었다. 6,500원짜리 된장찌개를 먹으면서 5조 원 뉴스를 보는 중소기업의 점심시간이었다.

오후 2시. 대표실. 도현은 대표에게 불려갔다.

김영수 대표는 자기 노트북 화면을 도현에게 보여주었다. 유튜브 영상이 일시 정지되어 있었다. 썸네일에는 "AI 챗봇으로 매출 300% 상승!!!"이라는 글자가 빨간색과 노란색으로 쓰여 있었다. 느낌표 세 개.

"도현아, 이거 봤어? 이 회사는 AI 챗봇을 고객 상담에 달았더니 매출이 3배가 됐대."

"네, 대표님. 어떤 회사인데요?"

"어... 쇼핑몰인가? 어쨌든 챗봇을 달았대. 그거 있잖아, 그 뭐시기, 챗GPT 같은 거. 우리 ERP 고객 상담도 그렇게 하면 되잖아."

도현은 의자에 앉았다. 잠시 말을 고르는 시간이 필요했다. 대표에게 기술을 설명하는 것은 도현의 업무 중 가장 난이도가 높은 일이다. 코딩보다 어렵다. 코드는 논리적으로 반응하지만, 대표는 논리가 아니라 감정으로 반응한다.

"대표님, ChatGPT는 범용 AI 서비스입니다. 우리 고객 상담에 그걸 그대로 붙이는 건 좀 다른 문제예요."

"왜? 질문하면 답해주잖아."

"네, 답은 해줍니다. 근데 우리 ERP 시스템의 데이터를 모르니까, 고객이 '내 주문 어디 있어요?'라고 물으면 답을 못 합니다. 우리 데이터베이스랑 연동이 안 돼 있으니까요."

"그러면 연동하면 되잖아."

도현은 속으로 심호흡을 했다. "연동하면 되잖아." 이 여섯 글자가 함축하는 작업량은 최소 3개월치다. API 설계, 데이터 정제, 보안 검토, 테스트, 배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할 사람은 도현 한 명이다.

"대표님, 연동하려면 우리 ERP 데이터를 정리하고, API를 만들고, AI 모델에 학습시키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려면 시간이랑 비용이 들어요."

"비용이 얼마나 드는데?"

"외주를 주면 최소 3천만원에서 5천만원 정도. 제가 직접 하면 비용은 줄지만 시간이 3개월 이상 걸립니다. 지금 SI 프로젝트 납기도 있어서 —"

"3천만원?" 대표의 표정이 변했다. "그렇게 비싸?"

"네. AI 챗봇이라고 해도, 우리 시스템에 맞게 커스텀하려면 그 정도는 듭니다."

"유튜브에서는 ChatGPT가 무료라던데."

도현은 눈을 감았다. 0.5초. 다시 떴다.

"대표님, ChatGPT 무료 버전은 일반적인 질문에 답하는 서비스입니다. 우리 회사 ERP 데이터를 읽고 고객 문의에 답하는 건 완전히 다른 제품이에요. 이름이 같은 'AI'라서 헷갈리실 수 있는데, ChatGPT를 쓰는 것과 AI 제품을 만드는 건 —"

"아, 그래. 그건 알겠어." 대표가 손을 저었다. "근데 요즘 다 무료 아니야? 오픈소스인가 뭔가. 무료로 할 수 있는 거 없어?"

무료. 대표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 4위. 미래먹거리, 플랫폼, 시너지, 무료. 이 네 단어가 한 문장에 들어가면 도현의 주말이 사라진다.

"무료 도구는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비즈니스에 맞추려면 개발 인력과 시간이 필요하고 —"

"그거 네가 하면 되잖아. 개발팀장이니까." 대표가 웃었다. 진심으로 웃었다.

도현은 웃지 않았다. 대표가 "네가 하면 되잖아"라고 말할 때, 그 "네"에는 풀스택 개발 + 서버 관리 + PC 수리 + ERP 관리 + 인사/총무 보조를 이미 혼자 하고 있는 34세 남성의 퇴근 후 시간이 포함되어 있다. 대표는 그것을 모른다. 혹은 알면서 모른 척한다.

"대표님, 제가 현재 맡고 있는 업무가 —"

"아, 알아알아. 바쁜 거 알아. 근데 이게 중요해. 미래먹거리야. SI 하청은 미래가 없어. 우리도 AI 시대에 맞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미래먹거리. 세 번째 등장이다. 도현의 어깨가 1.5밀리미터 올라갔다.

"일단 뭘 할 수 있는지 조사해봐. 비용은 최소한으로. 무료면 더 좋고. 다음 주까지 보고서 하나 만들어줘."

"네."

도현은 대표실을 나왔다. 복도에서 디자이너 정유진과 마주쳤다.

"팀장님, 대표님 뭐래요?"

"AI 하래."

"AI요?"

"응. 미래먹거리래."

유진이 2초간 도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메타버스 때처럼 2주 만에 까먹으면 좋겠다."

"이번엔 좀 오래갈 것 같아."

유진의 표정이 굳었다.

"왜요?"

"유튜브에서 AI 영상이 계속 나오니까. 대표님 알고리즘이 이미 AI로 도배됐을 거야."

유진이 "아..."라고 말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도현도 자리로 돌아갔다. 모니터에는 아침에 열어둔 VS Code가 있었다. 재고 조회 API. 페이지네이션. 납기 금요일. 도현은 VS Code를 보며 생각했다.

재고 조회 API 납기가 금요일인데, 대표는 다음 주까지 AI 보고서를 원한다. ERP 거래처 코드 오류 수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일은 건강보험 정산 파일을 변환해야 한다. 경리 박주임의 엑셀 매크로도 수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3층 프린터는 또 고장날 것이다.

오후 3시. 대표가 단톡에 영상을 또 올렸다.

단톡 — 넥스트비전 전체
김영수 대표 15:07
이거 봐봐. 5일 만에 앱 만들어서 앱스토어에 올렸대. 코딩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
김영수 대표 15:08
코딩 몰라도 되는 시대라니까
김영수 대표 15:09
도현아 이거 보면서 참고해

도현은 카톡 알림을 무음으로 바꿨다. 그리고 VS Code를 열고 재고 조회 API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코드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표의 말이 머릿속에서 반복되고 있었다.

"코딩 몰라도 되는 시대라니까." 대표는 이 말을 위로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개발팀장인 도현에게. 코딩 10년 한 사람에게. "당신이 10년간 쌓은 기술은 이제 무료 AI로 대체 가능합니다." 이것이 위로인가.

오후 5시. 영업팀 김과장이 퇴근하며 도현의 자리에 들렀다.

"도현 씨, 대표님이 AI 하자고 하던데. 진짜 해요?"

"네. 다음 주까지 보고서 만들어야 해요."

"우리 회사에서 AI를 어떻게 해요. 예산도 없고 사람도 없는데."

"그러니까요."

김과장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작년에 대표님이 '우리도 플랫폼 하자' 그랬을 때 영업팀에서 시장조사 보고서 만들었거든요. 2주 걸렸어요. 대표님 반응이 뭐였는지 알아요? '일단 보류하자.' 2주가 공중에 증발했어요."

"알아요."

"이번에도 그럴 거예요. 보고서 대충 만들어요. 어차피 안 읽어."

김과장이 나갔다. 도현은 김과장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충 만들기"가 도현의 성격에 맞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직함은 허울이고 월급은 적지만, 도현은 자기 이름이 붙은 결과물에 대해서는 타협하지 않는다. 그것이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야근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3,800만원에 이 회사에 남아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왜 이 회사에 남아 있는가. 면접을 볼 시간이 없어서? 이력서를 쓸 기운이 없어서? 아니면 여기를 나가면 더 나은 곳에 갈 수 있다는 확신이 없어서? 34세 중소기업 4년차. 이력서에 쓸 수 있는 것은 "풀스택 개발 + 서버 관리 + PC 수리"다. 대기업 면접관이 이것을 보고 뭐라고 할까. "아, 잡무를 많이 하셨네요."

* * *

Part IV

"결국 하게 됩니다"

오후 9시 14분. 도현의 원룸. 안양시 만안구 안양동. 보증금 1,000만원, 월세 42만원. 방 한 칸, 화장실 한 칸, 창문 하나. 면적 6.5평.

도현은 컵라면 뚜껑을 열고 3분을 기다렸다. 그 3분 동안 유튜브를 열었다. 검색창에 "중소기업 AI 도입"이라고 쳤다. 결과가 쏟아졌다. 썸네일마다 "혁신", "자동화", "10배 성장"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도현은 그 중에서 가장 조회수가 적고 썸네일이 수수한 영상을 골랐다. 경험상 그런 영상이 가장 현실적이다.

영상 제목: "AI 도입 실패 사례 — 중소기업이 빠지는 5가지 함정". 조회수 2,340. 올린 사람은 중소기업 컨설턴트라는 프로필이었다. 도현은 컵라면을 먹으며 영상을 보았다.

함정 1: 대표의 기대치와 현실의 괴리. 함정 2: AI 도구 비용 과소평가. 함정 3: 데이터 정리 없이 AI 도입 시도. 함정 4: 전담 인력 없이 기존 직원에게 떠넘기기. 함정 5: 단기 성과 요구.

5개 중 5개 다 해당된다.

영상이 끝났다. 추천 영상 목록에 "바이브코딩으로 SaaS 만들기 — 비개발자도 가능"이라는 영상이 떴다. 도현은 그것도 클릭했다.

영상 속의 사람은 Cursor와 Claude를 사용해서 프로젝트 관리 도구를 만들고 있었다. 프롬프트를 입력하면 코드가 생성되고, "Accept"를 누르면 에디터에 코드가 채워지고, 터미널에서 실행하면 화면이 나왔다. 깔끔한 대시보드. 반응형 디자인. 도현은 그것을 보며 두 가지를 동시에 느꼈다.

첫째, 감탄. AI 코딩 도구의 발전 속도는 놀랍다. 2년 전만 해도 코드 자동완성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전체 기능을 생성한다. 도현이 3일 걸려 만드는 CRUD API를 AI는 30초에 만든다.

둘째, 불안. 이것이 정말 "코딩을 몰라도 되는 시대"의 시작인가. 대표의 말이 맞는 건가. 10년 경력 개발자와 AI 프롬프트를 잘 쓰는 비개발자의 차이가 좁혀지고 있는 건가.

도현은 영상을 멈추고, 다른 영상을 검색했다. "Claude Max". 결과 중 하나를 클릭했다. Claude Max 구독 가격. 월 $200. 환율 적용하면 약 28만원.

Claude Max 월 $200. 내 세후 월급 268만원. 비율로 따지면 월급의 10.4%. 아메리카노 한 잔이 아니라 매일 아침 스타벅스 그란데 사이즈를 한 달간 마시는 가격이다. 불가능하다.

Claude Pro는 월 $20. 약 2만 8천원. 이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20짜리로 대표가 원하는 "AI 제품"을 만들 수 있는가.

도현은 메모장을 열었다. 컵라면 국물을 마시며 정리를 시작했다.

# 메모장 — AI 도입 현실

== 대표가 원하는 것 ==
- AI 챗봇 (고객 상담)
- AI 제품 (미래먹거리)
- 플랫폼 (언제나)
- 비용: 0원 (또는 최소한)
- 기한: 다음 주까지 보고서, 한 달 안에 뭔가

== 현실 ==
- 개발자: 1명 (나)
- AI 예산: 0원
- AI 전문성: 없음 (ChatGPT 무료 가끔 쓰는 수준)
- 데이터: ERP DB (정리 안 됨, 10년치 쓰레기 포함)
- 시간: 코딩 가능 시간 하루 2-3시간 (잡무 제외 후)

== 무료/저가 도구 목록 ==
1. Claude Free — 무료, 일일 한도 있음
2. Claude Pro ($20/월) — 월 2.8만원, 코딩 보조
3. ChatGPT Free — 무료, 범용
4. Cursor Free — 무료 티어, AI 코드 에디터
5. GitHub Copilot Free — 무료 티어 (월 한도)
6. n8n — 오픈소스 워크플로우 자동화
7. Flowise — 오픈소스 AI 챗봇 빌더

==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 ==
Phase 1: 내부 업무 자동화 (AI 도구로 내 생산성 올리기)
- Claude/Cursor로 코딩 속도 향상
- ChatGPT로 문서/보고서 초안 작성
- 비용: 0원 ~ 2.8만원/월

Phase 2: ERP 챗봇 (사내용, MVP)
- Flowise + OpenAI API로 간단한 FAQ 챗봇
- 데이터: ERP FAQ 문서 기반 (DB 직접 연동 X)
- 비용: API 비용 월 1-3만원
- 기간: 2-3주 (야근 전제)

Phase 3: AI 제품 (대표가 원하는 것)
- 현실적으로 불가능 (인력, 예산, 시간 모두 부족)
- 최소 인원 3명, 예산 5천만원, 기간 6개월 이상

도현은 메모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Phase 1은 혼자 할 수 있다. Phase 2는 야근하면 가능하다. Phase 3은 불가능하다. 대표가 원하는 것은 Phase 3이다.

시계를 보았다. 밤 10시 38분. 내일도 8시 47분에 출근해서 자판기 커피를 뽑고, 프린터를 고치고, ERP 오류를 수정하고, 대표 노트북 와이파이를 잡고, 그 사이에 재고 조회 API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다음 주까지 AI 보고서도.

도현은 유튜브를 끄려다가, 추천 영상 하나에 눈이 멈췄다.

"개발자 85%가 AI 도구 사용 — 2025 Stack Overflow Survey"

클릭했다. 영상은 짧았다. 핵심 내용: 전 세계 개발자의 85%가 AI 코딩 도구를 사용하고 있다. 가장 많이 사용하는 도구는 GitHub Copilot, ChatGPT, Claude. 생산성이 25-50% 향상되었다는 응답이 다수.

85%. 나는 그 85%에 겨우 발걸음을 걸치고 있다. 무료 Claude를 가끔 쓰는 수준. 대기업 개발자들은 회사에서 Copilot과 Cursor Pro를 지원해준다. 월 구독료를 회사가 낸다. 여기서는 자판기 커피 300원도 아까운데.

도현은 메모장의 Phase 1을 다시 보았다. "Claude/Cursor로 코딩 속도 향상." 이것은 대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지금 하루에 코딩할 수 있는 시간이 2-3시간이라면, 그 2-3시간의 생산성을 올리는 것이 먼저다.

Claude Pro 월 $20. 2만 8천원. 한 달에 점심 4끼 가격. 가능하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다. 먼저 무료로 어디까지 되는지 확인하는 게 순서다.

밤 11시. 도현은 노트북을 열고 Claude 무료 버전에 접속했다. 회사 상황을 입력하고 현실적인 AI 도입 방안을 물었다. AI의 답변은 도현이 메모장에 정리한 내용과 거의 같았다. Phase 1은 가능, Phase 3은 불가능. 다만 마지막 한 줄이 도현을 웃게 만들었다.

Claude Free
대표님께는 1~5번을 "AI 도입 로드맵 Phase 1"이라고 포장하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미래먹거리"라는 단어를 넣으시면 좋습니다.

도현은 웃었다. 처음으로 오늘 웃었다. AI가 중소기업 정치학을 이해하고 있었다.

후속 질문을 입력하려는데 메시지가 떴다. "일일 사용 한도에 도달했습니다." 무료의 벽. 세 번 주고받았을 뿐인데. 도현은 아까 본 Claude Pro 가격 페이지를 떠올렸다. $20. 29,000원. 점심 네 끼.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도현은 메모장을 다시 열었다. Claude가 준 힌트를 참고해서 보고서 골격을 잡기 시작했다. 제목: "넥스트비전 AI 도입 로드맵 (Phase 1)". 부제: "미래먹거리를 위한 첫걸음". 대표가 좋아할 만한 단어들로 포장하되, 내용은 현실적인 것만 담았다.

# 보고서 목차 초안

1. 왜 AI인가 — 대표가 좋아할 산업 트렌드 숫자들
2. 넥스트비전의 현재 위치 — AI 준비도 진단 (솔직하게)
3. Phase 1: 내부 생산성 혁신 — "혁신"이라고 쓰되 실제론 자동화
   3-1. 개발 생산성 향상 (AI 코딩 도구)
   3-2. 문서 업무 자동화 (ChatGPT/Claude)
   3-3. ERP 반복 업무 스크립트화
4. Phase 2: 고객 접점 AI (2Q) — 사내 FAQ 챗봇 MVP
5. Phase 3: AI 기반 신규 서비스 (하반기) — 조건부 로드맵
   조건: 인력 2명 추가, 예산 3천만원 확보
6. 예산
   Phase 1: 월 3만원 (AI 도구 구독)
   Phase 2: 월 5만원 (API 비용)
   Phase 3: 3천만원+ (인력/인프라)

도현은 Phase 5의 조건을 굵은 글씨로 표시했다. "인력 2명 추가, 예산 3천만원 확보." 대표가 이것을 보고 어떤 반응을 할지 예상할 수 있었다. "3천만원은 좀..." 그러면 Phase 3은 자동으로 보류되고, Phase 1과 2만 남는다. 그것이 도현의 전략이다. 실현 가능한 것만 남기고, 불가능한 것은 조건을 달아서 대표가 스스로 보류하게 만든다.

자정이 넘었다. 도현은 노트북을 덮고 이를 닦았다. 거울 속의 얼굴이 피곤해 보였다. 34세. 눈 밑에 다크서클. 새벽까지 코딩하는 날이 많아진 뒤로 생긴 것이다.

이를 닦으면서 생각했다. 대표가 원하는 "미래먹거리"는 AI 제품이 아니다. 대표가 진짜 원하는 것은 불안의 해소다. "우리도 AI 하고 있다"라는 말을 거래처에서 할 수 있게 되는 것. 뉴스에서 "AI 안 하면 도태된다"라는 기사를 볼 때 "우리는 하고 있어"라고 자기 자신에게 말할 수 있게 되는 것.

한국 기업의 99.9%가 중소기업이다. 고용의 81%가 중소기업이다. 그리고 AI 준비 완료 기업은 3%다. 나머지 97%의 중소기업에는 도현 같은 사람이 있다. 유일한 개발자이자 전산잡무총괄. 대표의 "미래먹거리" 요구를 받아서, 야근과 자기 돈으로, 가능한 범위 안에서 뭔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

도현은 불을 끄고 이불을 덮었다. 내일 해야 할 일: 재고 조회 API 페이지네이션 (납기 금요일), ERP 거래처 코드 마무리, 건강보험 정산 파일 변환, 경리 박주임 엑셀 매크로, 그리고 대표를 위한 AI 보고서 작성.

6시간 뒤에 알람이 울릴 것이다. 자판기 커피 300원. 멤브레인 키보드. 22인치 모니터. 팀원 0명.

그래도 결국은 하게 된다. 불가능한 조건에서 가능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중소기업 개발자의 직무 기술서에 없는 핵심 역량이다.

도현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카카오톡.

단톡 — 넥스트비전 전체
김영수 대표 00:17
이거 보고 잠들어

도현은 알림을 끄고 눈을 감았다. 오늘 점심에 먹은 된장찌개 맛이 떠올랐다. 박대리가 TV를 가리키며 웃었던 얼굴. 유진이 "AI요? 우리가?"라고 했던 표정. 그리고 대표의 카톡 7건.

내일의 할 일 목록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도현은 잠들었다.

내일은 화요일이다. 프린터가 또 고장날 것이다.

AI 예산 0원, 개발자 1명
미래먹거리는 야근으로 만듭니다

한국 중소기업 AI 준비 완료율 3%. 나머지 97%에는 한도현이 있다.